내 사랑은 주기적으로 번아웃을 겪습니다.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8
자주 듣고 말하는 단어라 무언 지는 아는데, 입으로 설명하자니 애매하다. 그래서 번아웃의 뜻을 초록창에서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정말 죽도록 사랑했고, 후회 없이 매 순간 열심히도 사랑했다. 10년을 신혼부부 아니 연애 초기처럼 그의 얼굴만 봐도 좋아했고, 그의 귀가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집으로 들어서는 그가 늘 반가웠다.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살을 맞댄 채 잠들고, 하루의 끝을 대화를 통해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또 아빠로서 그와 내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있는 당연한 일마저도 매 순간 나는 그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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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도 사랑하는 그 때문에 화가 나는 날이면, 남들보다 두 배 세배는 더 큰 배신감을 느낀다. 성질 급한 분노 또한 단숨에 한계치까지 오른다. 화가 난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악처로 변신을 한다. 온갖 화와 짜증을 끌어다 육두문자가 나오기 직전까지 퍼붓는다. 나도 내 자신을 통제하거나 제어할수 없는 상태인데도 묵묵히 참을성 있게 그 시간을 감내한 그가 말 한마디를 던진다.
"오빠가 미안해. 그래도 사랑해."
도대체 그 사랑이 뭐라고 미쳐 날뛰던 내가 순한 양처럼 온순해지냐고! 혹시 이 사람은 마법사가 아닐까?나도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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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를 치는 것까진 아니지만 매 번 그는 그다지 미덥지 못한 걸 알면서도, 10년을 이 사랑한단 소리에 매번 믿고 또 속길 반복하며 살았다. 그렇게 그의 와이프, 아내, 부인으로 사는 동안 나는 그를 사랑해서 그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했다.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비록 우리 사랑의 시작은 장밋빛이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꿈꾸는 먼 미래만큼은 명확한 장밋빛일 거라 기대했다.
멈출 수 없는 사랑에 미쳐버린 폭주기관차 같던 내 사랑이 지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누가 뭐래도 나는 끝까지 사랑만 하며 살 줄 알았는데. 착각은 자유라 했던가, 나는 지금 사랑의 번아웃을 겪고 있는 이혼녀 신세이다. 장밋빛일 거라 기대했던 결혼생활은 내 피눈물에 젖어 어느새 핏빛이 돼버렸다.
이혼
이 한 단어를 기점으로 내 사랑에 번아웃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번아웃을 겪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내 마음이 지쳤다는 건 맞는 말이다. 당기지도 못하고 끌려가지도 못한 채 지쳐 멈춰버린 사랑. 이혼과 재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느라 나는 지난 10년간 없었던 사랑의 번아웃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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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린다면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우리의 만남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나이다. 없었던 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그와의 시간과 과거들이지만, 단 한순간만큼은 되돌리고 싶은 때가 있다.
우리를 이혼하게 만든 그 일, 그때로 돌아가 나는 내 영혼을 팔아서도 그의 잘못을 바로 잡고 싶다.
이 죽일 놈의 사랑.
이 빌어먹을 사랑.
멍청해 빠진 사랑.
미련 투성이 사랑.
곱게라도 미쳐야지, 이 사랑은 더럽게 미친 것이다. 그래서 아니다 싶을 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를 갉아먹고 나를 내려놓고 나를 버려가며 지켜온 사랑에 지쳤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그를 놓지 못하는 건 집착일까 오기일까?
"힘들어. 살려줘."
열심히 하루를 마무리하고 늦은 밤 이불 안으로 들어서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친 날 그저 짠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던 전남편이 어느 순간부터는 오일을 슥슥 손에 바른 후 잔뜩 뭉쳐있는 내 어깨나 뻐근한 허리를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
"저리 치워! 다 귀찮아!"
사랑에 번아웃이 온 날에는 그의 꼴도 보기 싫고 손톱만큼 닿는 것도 싫다. 그를 향한 못된 말들에도 꿋꿋하게 문질문질 조물조물하는 그는 퍽 지조 있고 일관된 사람이다.
"으으으, 아파. 근데 시원해."
줏대도 없이 어느새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그의 손길에 나를 맡기고 있다.
"아야 아야, 어 그래 거기 거기"
그의 손길에 시원도 하고 아프기도 해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사람은 미워죽을 판인데 손 맛은 최고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안마의자 보다 훨씬 더 세심하며 시원하다.
"불쌍한 것", "오빠 만나 네가 고생이 많다.", "고생시켜서 오빠가 미안하다." "사랑해, 영원히"와 같은 말 따위가 뒤통수에서 들린다.
"닥쳐. 영원은 빼!", "그 따위 사랑 개나 줘버려." "말로만 다 조지고 있어!"
속으론 좋으면서 마음과는 다른 말이 대번에 나오지만 그는 이미 내 속마음을 다 아는 듯하다. 마사지하던 손길이 조금 야릇해진 걸 보니.
"사랑해"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그의 하찮은 고백이 아직도 내게는 유효한지 제법 감흥이 있다. 사랑 하나 믿고 까불다가 크지도 않은 코를 다친 것처럼,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졌던 자존심과 자존감이 단박에 튀어 오른다.
이혼과 재혼 사이에서 전남편이 내게 건네오는 고백은, 이혼 후 주기적으로 오는 번아웃을 견디게 하는 마법을 가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갈대 같이 줏대 없이 흔들리는 나는야 여자이다. 그래도 아직은 전남편에게만큼은 사랑받는 여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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