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책임져!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7

by 딱좋은나

"책임도 못질 거면 장가가지 마. 시작도 말아야 돼!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가 고생시킬 거면,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전남편이 들으랍시고 던진 말이지만, 내 앞에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앉아있다.

전남편의 학교 후배이지만 나와 동갑이라 친구가 된 K이다.



내 기준에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놈!'인 K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다. 전업작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는 K는 지방이지만 자신의 아틀리에를 따로 가진 나름 멋지고 홀가분한 인생이다.


그런 K가 전남편의 일을 도와주느라 우리 집에서 며칠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후배가 반가워 기분 좋게 저녁식사에 반주를 곁들인 전남편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널브러졌다.



"근데 넌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


이미 잠이 푹 들어버린 전남편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조심성 있게 작은 목소리로 K가 물었다.


세상에서 나 혼자만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건만 전남편을 보면서 나는 자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내 말을 들어줄 K도 왔겠다, 식사시간 내내 보란 듯이 한바탕 한탄을 늘어놓았었다. 입에 모터를 단 듯 내 처지를 비관하고 이만큼이나 하고 살게 된 내 공치사를 쏟아내었다. 이미 몇 번이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익숙해질 법도 한 내 행패이건만, K가 보기에도 이번엔 유독 내가 너무하긴 했다. (게다가 다이어트 중이라 볼살이 빠져 좀 힘들고 짠하게 보인 듯하다.)


"야! 40대 때 힘들게 살지! 너 60, 70 먹고 이렇게 살 거야? 빈 병 모르고 폐지 줍고 하면서?

하긴 너는 그림 그리고 살면 되겠다. 그런데 물감은 누가 그냥 준대?

돈 많이 벌어 놔라. 넌 용돈 줄 자식도 없어서 니 국민연금이고 노령연금이고 다 내 새끼들이 대줄 텐데.

괜히 내 새끼들 고생시키지 말고, 미리미리 젊고 힘 있을 때 나중에 쓸 돈 다 벌어 놔! 그림도 똑바로 그리고 말이야!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말고!"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와 함께 얼마 전 공모전을 호기롭게 시작은 했으나 시간 부족을 빌미로 중도 포기한 그를 향한 뼈 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흥분하면 속사포처럼 빨라지는 내 말을 그가 다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뜻은 잘 전달된 것 같았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자 이혼한 전남편까지 건사하고 사는 나는, 매일매일을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더 열심히 사는 중이다.




"누나 힘든 거, 그거 다 누나 욕심 때문이잖아."


빚을 내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일으키고 유지하며 허덕이는 나와는 달리, 남동생 부부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맞벌이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돈이 생기면 대출부터 갚고 보는 나와는 정 반대로 남동생 네는 비상금으로 쓸 수 있는 얼마 간의 여윳돈을 항상 지니고 산다. 그 덕에 진짜 돈이 급할 때 나는 동생 부부에게 SOS를 친다.


이자도 받지 않고, 언제 줄 거냐.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고 한 번을 묻지 않는 동생네의 여유가 참 부럽다. 돈을 빌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도 빌려 쓰는 사람 말고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뿌리가 없는 나무가 서는 법은, 줄기와 잎과 꽃에 갈 양분을 뿌리에 몰빵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자식에게, 내 부모형제에게, 나와 가깝게 관계를 맺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주어야 할 양분까지 모두 뿌리내리기에 쏟고 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내리는 데 내 삶을 열중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내 사정을 다 알면서, 그걸 욕심이라 부르는 남동생이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때마다 돈 빌려 쓰는 놈에겐 서운함도 사치이다. 빌려 쓰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에나 가져도 될 사족 같은 마음은 지금의 내게 독이 될 뿐이다. 동생의 말을 곱씹을 때마다 입안이 절로 써지는 것을 견디며, 마음 한 구석에다 서운함을 고이 접어두기로 한다.(곱씹는단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뒤끝 작렬 A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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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우먼 흉내를 내고 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은 사서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이 서럽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내 선택 내 책임인 걸 알면서도 괜히 탓할 누군가가 필요해진다. 대게는 그 탓을 전남편에게 돌리고 있지만, 어느 날 우리 집에 다니러 오게 된 엄마를 마주하자 동생의 말이 생각났다.


"이게 다 내 욕심인 거 나도 아는데, 브라봉 입에서 욕심이라 들으니 나 좀 서운했어. 슬펐어."


동생한테 서운한 속내를 털어놓을 곳은 엄마뿐이라 그냥 지나는 말처럼 하소연 한 건데. 뒷자리에 앉아계신 엄마의 눈이 대번에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시집간 이후 늘 걱정만 시키는 딸의 처지가 가뜩이나 가엽고 안타까운 모정이다. 거기에다 대고 동기간의 서운함을 토로한 철없는 나의 말은 가시가 되어 엄마를 찔렀다.


"서운해도 어쩌겠니. 네 동생이라 네가 안타까워 그런 거지. 네가 내 인생 닮아가는 것 같다고 하드라."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건 부부 둘이 해야 한다. 내 기억에서 우리 아빠는 엄마의 도움 없이는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적이 많았다. 엄마는 지난 시간 동안 자식을 위해 많은 책무를 다 하고 책임을 져오셨다.


독한 파마 약 냄새도, 생선 비린내도, 따가운 페인트 냄새도 감내하며 살아온 그악한 엄마였다.


소녀 같이 여린 마음을 고집과 아집으로 포장해 두고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과 내 인생이 닮았다니! 내 동생 눈에 비친 내 인생이 엄마의 인생과 닮아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 보다 가방 끈도 길고 훨씬 많은 것들을 할 줄 아는 나는 절대로 엄마 인생만큼은 닮지 않을 줄 알았다. 적어도 엄마보다는 대접받고 누리고 살 줄 알았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삶은 죽도록 닮기 싫었다. 엄마가 감내한 삶을 부정하거나 엄마의 희생과 인내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엄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티끌만큼이라도 닮지 않고 싶단 건 내 진심이다.


"그래도 나는 남편 사랑은 받고 사니 엄마 보단 내가 좀 낫잖아!"


민망해진 나는 더 이상의 속마음을 꺼내놓지 못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혼은 했지만 이럴 땐 전남편이 아니고 남편이란 단어를 쓴다. 우리 엄마 마음 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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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걸 한 이후 나는 내 선택에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억척이나 지지리 궁상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10년 정도 그 시간들을 견딘 덕에 지금의 나는 그래도 남들만큼 보통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


빚은 잔뜩이라도 여태껏 넘어지지 않고 잘 버텨나가고 있다. 일도 육아도 살림도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내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요즘의 난 앞으로 딱 10년만 더 고생할 거라고 한다. 10년의 끝은 분명히 오늘보다 안정되어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그때는 이혼일지 재혼일지 결론이 나있지 않을까~?)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내 인생,

나는 오늘보다 나을 내일을 위해 매 순간 그저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돈 걱정이 가장 편한 걱정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만하면 내 인생 그래도 브라보이니까 버텨볼 만하다. 하고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매번 자기 암시를 걸어 다시금 일어난다.







사실은 결혼할 때만 해도 나는, 남편이라는 사람이 여자인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신차 구매, 전셋집, 내 집 마련, 기타 등등등. 그는 우리가 함께 이룬 어느 것 하나도 그의 자력으로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 언제나 책임은 내 몫이었고, 그는 매번 내 인생에 편승해 왔다.


이혼녀가 된 지금에서야, 이혼과 재혼 사이의 그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라도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책임질 수 있을 때. 그때 우리 재혼합시다."



나도 가끔은 기대고 싶다. 난기류를 만난 듯 흔들릴 때 마다 무섭고 두렵다. 나도 여자고, 나도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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