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를 지켜보겠습니다.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9
"말 좀 이쁘게 해"
전남편이 남자친구였을 때부터 내게 부탁하던 거다.
"애들한테 말 좀 예쁘게 해. 야! 야! 하지 말고 애들 앞에서 욕도 하지 말고."
아이를 셋 낳고 엄마로 사는 내게 남편이 된 그가 부탁한다.
"하아.......... 장모님이 30년을 해도 못 고치신 걸 내가 어찌 고치겠어."
이혼을 한 전남편이 된 그는 이제 체념을 한 듯하다.
"엄마 욕 잘하잖아", "엄마는 욕 하면서" 잔뜩 억울해진 딸들이 꿇어앉았다.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를 겪는 중인 딸들은 하늘을 향해 뻗은 팔도 아프고, 딱딱한 바닥에 눌린 무릎도 아프다.
"니들 나이가 몇인데 지금 욕을 쳐하노? 것도 내 귀에 들리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잔뜩 굳은 채 터져 나온 내 사투리에 딸들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사투리는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는 경보이다.
욕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답시고 초등학생인 두 딸들에게 욕이 가진 의미,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까지도 가르쳐줬던 나였다.
"너네도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욕 해라이, 근데 그때도 엄마인 내 앞에선 안 된다."
욕 한번 했다는 이유로 잔소리 백만 개를 쏟아붓고, 마무리로 이런 어불 성설까지 투척했다.
애들을 다 꾸짖었다 싶을 때 "누구 닮아 그러겠어" 하고 한마디 하는 전남편.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가뜩이나 욕 잘하는 성격 험한 엄마의 권위가 추락한다. 쓰읍.... 마음의 소리는 묻고
"너나 잘하세요."하고 대꾸를 했다.
"어허, 또또 그런다. 예쁘게 좀 말하라니까. 교양이 없어. 촌년이라 그런가."
"어이 경기도민, 아니 남바(number의 경상도 사투리, 주민번호를 뜻 함)는 강원도에서 단 주제에 어디 직할시더러 촌년이래?"
결국 그의 촌년이란 한 마디는 뱃속부터 끓어오른 지역감정으로까지 번졌다.
자, 지금부턴 딸들이 아닌 전남편이 타깃이다. 공격력 200% 상승!!!!!
기본적으로 내 혓바닥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장착되어있다.
나는 부산 사람 중에서도 짠내 나는 거친 사투리가 유독 심한 편이다. 사투리를 고칠 생각도 마음도 필요성도 못 느끼며 서울경기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다.
혼자서는 고칠 일이 단 1도 없었을 텐데, 애들을 키우면서 말투가 그래도 나름 많이 보드라워졌다. 여전히 표준어 구사는 불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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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나거나 급하면 말이 빨라지고, 숨겨둔 발톱이 드러나듯 대번에 사투리 억양의 거친 말이 나온다.
그때부터 머리는 대가리가 되고 손에는 모가지를, 다리에는 몽뎅이가 붙는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명사 앞에는 '개'가 붙고 동사 앞에는 '쳐'가 붙는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갖추라고 했건만 나는 그런 말은 알면서도 따르는 않는 (혹은 못따르는) 청개구리이다.
나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날 것 그대로의 내 감정을 내비칠 수 있는 건 가장 가까운 이들뿐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묶였던 전남편과 절대약자인 내 아이들에게만 솔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화가 나면 말로써 내 감정과 기분을 모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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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이 다 표현하고 다 쏟아내며 사는 사람이 우울증이고, 암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뒈져버렸게?" 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나를 지적한 사람도 있었다.
이 집에서 늘 퍼붓는 건 나고 받아내는 건 전남편이다 보니 아이들이 보기에 보통 그는 피해자이고 나는 가해자이다. 더불어 아이들 또한 불똥이 튈까 걱정해야 하는 새우등 신세이다.
"나는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어."
"맞아. 어떨 때 보면 사이가 좋은 거 같고. 또 어떨 땐 사이가 진짜 안 좋은 거 같아."
첫째와 둘째가 나와 전남편을 앞에 두고 앞담화를 하고 있다.
"이만하면 엄마아빠 사이좋은 거 아니야? 엄마아빠만큼 대화 많이 하는 부부도 없을 걸?"
여유로운 전남편의 물음에는 우리 사이는 좋은 편이란 확신이 있다.
"아니 좋은 거 같은데도, 엄마 아빠 맨날 싸우잖아.
엄마가 맨날 아빠한테 화내는 거 보니까, 나는 결혼 안 하려고. 이런 결혼하면 스트레스받아 죽을 거 같아."
"야 맨날은 아니거든!"
싸우는 것에서 엄마가 화내는 것으로 바뀐 딸의 말에 뜨끔해진 나는 소리를 높여 부정해 본다.
내 딸들이 보는 우리의 부부 생활은 비혼을 부르는 모습인가 보다.
누구를 위해서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데, 내 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오 마이 갓!"
전남편이라는 건 참 희한한 존재이다.
동거를 하고 있지만 호적이 합쳐지진 않은 남이다. 남편도 남자친구도 아니지만 유대감을 갖고 애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그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어느새 내 인생 절반에 가깝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까지 모두 다 아는 그를 가감 없이 솔직한 모습으로 대하다가도, 이렇게 가끔은 조심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남의 편이든 남이든 그는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닌 건 맞으니까. 우리는 이혼과 재혼 사이에서 가깝고도 멀리 있다.
전남편인 그에게 조금 더 예의를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예쁘게 말해본다니 그가 코웃음을 친다. 개가 똥을 끊지 라나 뭐라나)
이혼은 했더라도 혹시 재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예의를 최대한 갖추어 봐야겠다.
가까운듯 먼 전남편 :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