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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un 23. 2023

아빠 닮은 아빠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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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


자라는 동안 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싸울 일은 많았어도, 딸인 나에게 만큼은 잘 들려주지 않은 말이지만 참 들을 때 마다 짜증 나는 말이었다.



시골에서 부산으로 돈 벌러 와서 터를 잡아버렸으나, 평생을 하고 사신 게 노동력 대비 생산성이 크지 못한 일이다보니 평생을 돈에 쪼달리며 살아햐 했던 내 부모님. 그렇게 힘들게 한 고비 한 고비 넘기며 애 둘을 키우며 사는 부모 슬하에서 나는 뭘 해달라 뭘 사달라 욕심을 내면 안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상황에 수긍하고 부모를 배려하는 그리 착한 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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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 의 표본 우리 아빠.


시장 구경 좋아하고 꽂히면 지르고 보는 지르기대장 아빠 덕에 셋집에 살아도 어지간한 건 다 갖추고 살았다.

그래서 친구 집에는 없어도 우리 집에는 있는 것들이 많았다. 워낙 잡다한 게 많다보니 그다지 필요하다 갖고 싶다 한 것도 딱히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아빠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탓에 뭐라도 갖고 싶은게 생기면 반드시 가져야만 했던 집념의 아이였다.(물론 결혼 한 후부터는 기회비용부터 생각하는 짠순이 아줌마라 그렇지 않다. '부모 돈은 공짜'였지만 내 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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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때부터 책장은 없어도 200여권의 책을 항상 보유하며 다독하던 나였다. 종이박스에 책을 넣어두고 골라읽는것도 그저 좋던 책벌레 소녀였다.

나는 그냥 '책을 읽는 게' 좋았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정말 많아서 오로지 재미로 책을 읽고 보았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한 책은 빨간색 양장 테두리에 금색으로 이름이 적힌 어느 출판사의 백과사전 한 질이었다.

그 애정하는 백과사전도 방문판매 아줌마가 집으로 와 몇 권 샘플로 보여주며 처음 알게된 것이다.

엄마 아빠와 말씀을 나누는 아줌마 옆에서 조심스레 책장을 들춰가며 도둑질을 하듯 읽었는데. 정말 내 것이 아닌 게 아쉽도록 재밌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너무 많아 백과사전은 호기심 천국인 내게 맞춤형 도서였다.

비싸다며 손사래치는 부모님을 며칠동안 졸라 기어이 방문판매 아줌마를 다시 오게끔 했다. 할부로 사주시며 영수증에 반듯 반듯 글자를 쓰는 아빠의 손에 유난히 힘줄이 불거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일단 나는 아빠의 주머니 사정은 모르겠고, 기어이 쟁취해냈다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당시에도 꽤 비쌌던 백과사전 한 질은 국민학교 6년동안 내게 최고의 선생님이자 제일 재밌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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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저학년  어느날, 부잣집 딸로 유명한 친구 집에 생일초대를 받아 갔다.

나는 그 아이의 방에서 컴퓨터를 처음 보았다. 이게 뭐냐고 묻는 친구들 성화에 만족의 웃음을 보이며 친구는 어머니의 허락까지 받아가여 컴퓨터를 켰다. 그리입이 떡 벌어진 친구들 앞에서 손수 너구리 게임을 시연해주었다.

지가 할땐 그리 의기양양하더니 너도 나도 해보자고 달려들자 비싼거라 고장나면 안된다고 친구들은 시켜주지도 않고 컴퓨터를 껐다.

치기 어린 마음에 약이 빠짝 오른 나는 집에 돌아와 부럽더라 는 동정에 나만 안시켜주더라 하는 거짓말까지 보태 부모님의 마음을 흔들어 댔다.

지르기대장인 아빠가 욱해주신 덕에 나는 아빠의 당시 한달 월급보다 더 비쌌던 삼성 매직스테이션 컴퓨터를 또 할부로 가지게 되었다.

그 후부터 우리집은 내 친구들에게 플로피 디스크를 넣고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는는 오락실이 되었다. 팬티엄 2에서 3로 넘어가던 오래 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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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컴퓨터란 게 생긴 후 아빠 컴퓨터 학원에 보내시며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 후로도 주기적으로 컴퓨터를 바꾸어주셨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자 우리집은 내 친구들 사이에서 공짜로 양껏 부를 수 있는 노래방이 되었다. 컴퓨터에 깔린 노래방 프로그램은 그당시 나를 인싸로 만들기 충분했다.


컴퓨터로 도취감과 우월감에 빠져본 경험은 나를 얼리어댑터가 되게 했다. 국민학교 졸업엔 삐삐를, 중학교 졸업엔 핸드폰을 선물로 받으며 또래보다 신문물을 빨리 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요구하기도 전에 턱턱 내어주던 아빠 덕이었다.


내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통신망이 2G에서 3G로 넘어오는 동안. 나는 새로운 기종이 나오면  파손, 기기변경, 통신사 이동 등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바꾸고 보았다. 사과폰이 첫 출시 될 때도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전 예약부터 걸었다. 한 달도 안되어 도둑 맞을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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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요구 할 때는 또 얼마나 당당하게 했던지!나는  뜬금포로 몫돈 만들어 달라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땐 맡겨 놓은 걸 찾는 식이었다. 미안함이나 죄책감 같은 것 대신 부모라면 응당 내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냐는 막무가내식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치고 합격증을 가지고 가 아빠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운전학원에 등록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내 대학교 등록금 준비까지 해야해 버거운 시기셨지만 결국 돈을 내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만 19세가 되기 전에 아빠의 돈을 쳐발라 1종 보통의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지금까지 내가 배운 가장 좋은 기술은 운전이라 할 정도로 유용하게 그 기술을 써먹고 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학기 중엔 장학금을 받기위한 공부를 해야하니 알바는 못한다, 매달 내가 필요한 용돈은 아빠가 줘라. 대신 공부 안하는 방학 때는 내가 돈을 벌어 쓰겠다며 날짜와 금액까지 지정해서 달용돈을 받았다. 아빠의 수금이 늦어 용돈이 하루라도 늦어지는 날이면 온 집안이 시끄러울 정도로 못되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수능 직후 주유소에서 총질 하느라 기름독이 오르면서도 꿋꿋하게 번 내 첫 알바비를 모두 내 부모님께 드렸던, 경우는 있는 딸이었다.


  이제 졸업만 시키면 되겠구나 했던 대학교 4학년 때엔, 그간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으니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돈은 아빠가 학비를 내준 셈 치고 준비해달라고 했다. 3년 반동안 내가 받은 장학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싸게 치는 거라며. 무역학이 전공인만큼 해외경험은 필수란 말을 덧붙여 아빠를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400만원을 받아들고 나는 유유히 1년의 여정을 떠났고, 그때의 경험과 인연은 사는 동안 내게 값진 경험이자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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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니 참 나는 저밖에 모르는 못된 가시나였다. 꼬박 꼬박 근거를 덧붙여 요구를 하니 자식에게만은 관대하신 내 부모님께서는 해주지 않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을 테다. 한번 꽂히면 될 때까지 삐약 삐약 계속해서 졸라대던 집념과 부모님의 죄책감을 아무렇지 않게 긁는 영악함은 도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아마도 아빠 닮은 아빠 딸이라서 본능적으로 아는 거겠지.



사는 동안 아빠는 늘 엄마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원하고 마음껏 저지르셨다. 가계 경제는 앞 뒤 따지지도 않고 아빠가 하고 싶은거 사고 싶은 거 다 하고 다 사셨다. 아빠는 만족하고 좋아죽는 그 소비의 뒷감당은 늘 엄마 몫이었다.

매번 사고를 치는 아빠와 맨날 참고 수습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아빠를 답습한 것 같다.


아빠 닮은 아빠 딸이라서 자라는동안 나는 막힘 없이 거침 없이 다 하고 살수 있었다. 죄책감도 하나 없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빠를 참아준 엄마처럼 나를 참아준 동생 브라봉에게 고맙다. 우는 아이 젖 더 준다고 앵앵거리는 나 때문에 동생이 늘 뒷순위였단 걸 애 셋을 키워보니 이졔야 알겠다.


아빠 닮은 아빠 딸이라서 엄마 닮은 엄마 아들 네게 내가 미안해.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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