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못한 타투를 40대에 했다

젊은 날의 비행기

by 딱좋은나

처음 타투를 하고 싶었던 것은 20대였다.

나는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서 1년 조금 넘게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와 함께 지낸 이들은 한국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류가 통가, 사모아 사람들이었다.


남태평양 아주 작은 섬나라 통가는 골드티쓰(액세서리 금니 GOLD TEETH),

사모아는 영화 모아나의 마우이가 한 것 같은 타투가 그들의 전통이고 문화이다.

겉보기엔 남한과 북한 사람처럼 아주아주 비슷하지만

관계 또한 남한과 북한같이 가깝지만 먼 그들 사이에서 나는 나름 잘 지냈다.


코리언 갱스터, 마초걸, 타미걸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나를 부르던 그들은

몇 배나 더 아플 것 같은 금니와 타투를 잘도 견디면서

내 왼쪽 귀에 뚫린 여섯 개의 구멍에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솔직히 나는 나름 대접받고 큰 종갓집 맏딸이란 타이틀 덕인지

나에게만 관대하고 타인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표본이랄까....


양반댁 규수도 아니건만 뭐 대단한 집안이라고

고지식함으로 둘러싸인 우리 집안 가풍이란 프레임은

자라는 동안 어쩔 수 없는 내 삶의 나침반이자 기준이 되었다.


젊은 시절 한 때나마 화려하게 살았다던 우리 아빠 몸에도 칼자국은 있어도 잉크 자국은 한 방울도 없다.

우리 엄마는 워낙에 눈썹 숱이 적은 탓도 있고 미용실을 하셨다 보니, 그 옛날부터 눈썹과 아이라이너를 문신으로 하고 계셨다.

반영구 화장이 생기기 훨씬 전에 한 푸른빛이 도는 그 미용 문신을 아빠는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얼굴에 그게 뭐고!" 하시면서.


미용 목적의 문신도 그리 대하는 아빠를 보고 컸다 보니,

나는 당연히 타투 같은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가끔 내가 타투를 하고 싶다, 하면 어떨까 말만 꺼내도 아빠는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몸에 그림 그리기만 해 봐라, 문신한 니 가죽을 홀랑 벗겨버릴 거다"는 살벌한 협박도 덤으로 얹어주셨다.

- 우리 엄마에게 들은 최고의 욕은 가시나일 정도로 엄마는 바른말 고운 말만 쓰시는데.

우리 아빠는 욕도 참 잘하지만 말 또한 상상초월로 살벌하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언어습관을 그대로 빼다 박은 완벽한 아빠 딸이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방송에서조차 타투는 가려야 하는 흉물이었고,

문신이란 건 건달이나 양아치가 드러내지 않고 비밀처럼 지니고 살던 것이었다.





호주에서 타투하려고 시도는 했으나 두 번을 실패했다.


브리즈번 시내 타투샵에 들어가

엉덩이 위 허리에 박을 예쁜 디자인까지 다 골랐는데

영업시간 끝났으니 내일 오라며 나가라고 했다.

시계를 보며 벙쪄있는 나와 함께 있던 언니가 그랬다.


"나가자, 얘들 또 인종차별 하는 거 같아."


그랬다.

옆에 타투를 받고 있는 애를 보니 백인이었다.

나는 인종차별을 또 당한 듯했다.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지나가는데 눈꼬리를 찢어가며 야유하거나

마늘냄새난다거나 빵상 아줌마도 아니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우리 말을 요상하게 흉내냈다.

그 끝은 언제나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욕이었고.

장을 보러 간 마트 주차장에서 장 보고 나오는 놈이 던진 날계란도 맞아봤다.

글로벌 프랜차이즈인 KFC에서 닭 떨어졌다고 거절당했는데,

딴 거 먹을까 하며 고민하는 사이 뒷사람은 버젓이 주문하는 수모도 겪었다.

호주 국내 항공기를 타는데 캐리어 부치는데 없던 차지를 붙여서 싸워도 봤다.

나 혼자 있어도 그럴 텐데 내 주위엔 항상 덩치 크고 시커먼 통가나 사모아 친구들이 있었으니 더 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한국인이지만 진짜 동남아시아 삘로 생긴 언니가 같이 있었다.

거기다 우리는 농장에서 일을 하고 난 후라 시커멓게 타 있었다.


제기랄.

두 말 않고 가게를 나왔다.

내일 아침부터 쳐들어오면 그땐 뭐라고 하며 거절하려나 하는 상상을 하며.

물론 자존심에 두 번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이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은 깡촌이어서 인종차별이 더했단 건 알겠는데, 브리즈번 시내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충격이었다.


하아....................


다음 여정인 시드니에서 한국인들도 많이 받았다는 타투샵을 소개받아 찾아갔다.

트레인이 지나다니던 다리 근처에 있던 타투샵이었던 것 같은데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부푼 꿈을 안고 갔건만, 가게 문도 안 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슨 사건에 휘말려서 영업을 못한 거였다.)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지금 당장이 아니면 시간이 없는데.

예약 전화 없이 간 내 잘못이라고 하며 돌아섰다.

그냥 사모아 애들이 하라고 하는데서 했을걸, 마우이 같은 왕 큰 문신 떠줄까 봐 쫄아서 거긴 안 갔는데.

후회를 하며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주를 예닐곱 번 들락날락하는 동안

혼자 스탑오버로 체류했던 싱가포르에서도 타투를 하려고 시도했었다.

리틀인디아 근처 어느 시장골목이었는데,

솔직히 거기에선 드러눕는 순간 뭔 일 당할 것 같아 급히 나왔다.

평소엔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하며 겁 없이 살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그 가게에선 겁이 났다.

엄마한테 혼날 거 같아서 다시 생각하고 오겠다며 걷었던 옷을 내리는 나를 보고 천진하게 웃으며 보내주는 타투이스트를 보며 과한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경험 상 안 땡길 땐 뭐든 안 하는 게 최선이다 싶어 그대로 나왔다.


몇 년 후 한국에서 우연히 남자 타투이스트를 알게 되었다.

정말 기뻐하며 나도 타투를 해달라고 했더니 나더러 어지간하면 하지 말라했다.

왜냐고 물으니 본인이 생각보다 이 쪽 계통으론 유명해서 비싸다고 하면서 하고 싶으면 조수 통해서 예약하라고 했다.

아마 내가 돈이 없어 보였나 보다. (돈이 없기도 했다.)

그래도 오매불망 기대하던 타투에 쓰는 돈은 안 아까워서 달러빚을 내서라도 쓸 배포도 있는 나인데!

날 깔보며 뻐기는 그 새끼한테 돈을 주기는 싫어서 관뒀다.

에잇 퉤 퉤 퉤 안 하고 말지 하며.


그렇게 몇 번이나 못하다 보니 마치 문신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 같았다. 그래서 나는 타투하기를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 내가 40살 기념으로 타투를 했다.

상그니 언니가 타투를 배워서 마루타가 되기로 한 것이다.

마루타나 되려고 40년 동안 지켜온 백짓장(?!)은 아닌데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기꺼이 언니의 연습장이 되기로 했다.


뭐할 거냐 묻는 언니의 질문에

초록창에서 라틴어 문구를 찾았다.


Luctor et emergo, Lucete!

나는 노력하고 있고 떠오르고 있다, 밝게 빛나라!


아주 반듯반듯한 고딕체 그대로 쇄골 아래에 새겼다.


나에게 타투를 해준 상그니 언니가 그랬다.

"필기체도 아니고 흘림체도 아닌 고딕체로 레터링을 하는 년은 처음이다."


타투라는 일탈을 하더라도 나는 반듯한 고딕체를 벗어날 수 없는 종갓집 맏딸이다.

위기의 마흔을 맞이한 내게 주는 위로였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삐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의 길을 묵묵히 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했고.


아이들 셋은 엄마 몸에 새겨진 글을 보며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다.

뜻을 말해주자 멋있다고 이쁘다고 했다.

위화감이 없는 애들에게서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 것들도 커서 타투한다고 몸에 잔뜩 낙서 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되었다. 내 몸에 그린건 괜찮은데 자식 몸에 타투는 싫었다. 오늘도 변하지 않는 내로남불이다.



평생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얻게된 타투라 자랑하고 싶었다.

타투를 했노라며 전화로 소식을 전하자 엄마와 아빠는 날 더러 하다 하다 별 걸 다 한다고 애엄마가 미쳤다고 했다.


다행히 멀리 있어선지 시집을 가선지 아빠한테 잡혀서 가죽이 벗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집과 동시에 관리 권한이 넘어갔다고 여기시는 듯 아빠는 남편도 못 말리는 나를 누가 말리냐 하셨다.

크게 하지 말아라. 더는 하지 말아라. 하는 정도로만 말씀하시고 얼른 전화를 끊으셨다. (그 뒤에 실제로 보여드리니 흉하다고 치우라고 하셨다. )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하지, 싶다가도.

내 아이들의 배우자나 사돈댁에 비칠 내 모습이 어떨지 생각하면 멈추게 된다.

내 로망은 허리부터 시작해 팔까지 용 한 마리가 휘감아서 올라오는 건데 몸매가 안돼서 못한다는 핑계로 참아왔으니 끝까지 희망사항으로만 남겨둬야 될 듯하다.



20대에 못한 타투를 40대에 했다.


타투는 하나도 없이는 살아도 하나만 있는 사람은 없다는데,

나도 하나가 생기니 둘도 셋도 하고 싶다.

또 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아본다.

자기만족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최면을 걸어본다.


타투 더 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하고싶... 그만.

에레이.


내 몸에 새긴 나의 각오는 매일 거울로 마주하며 나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준다.

나는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해나갈 거라고 믿게 한다.


매일 거울에 비친 내 타투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한다.

더욱 높이 올라 밝게 빛나도록 열심히 살자고 각오를 다진다.

보기만해도 든든하고 흐뭇해지는 타투가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이 정도면 타투 하나쯤 있는 건 비행이 아니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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