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과 영정사진 3

생명과 맞바꾼 목숨

by 딱좋은나

"장인어른 수술 하셔? 다시 부산 안 가봐도 돼?"


전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물었다.


"죽었다 하면 장례식 치르러 가는 거고,

살았다 하면 조카 돌잔치하러 가서 보고 오면 되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린다한들 내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꺼질지 모르는 아빠의 삶과는 별개로 나는 딸이기도 하지만 엄마이기도 하고 일도 해야하는 내 삶을 살아야했다.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준비를 마친 나는 아이들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나를 학교 앞까지 태워주고 출근을 했다. "일찍 올게. 연락 줘."라고 말하며.





사실 아빠가 쓰러진 그 주 주말에는 내 남동생이 결혼 5년 만에 어렵게 가진 조카 녀석의 돌잔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형님, 돌잔치를 진짜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빠의 수술은 6시간을 조금 넘기고 끝이 났다.

다행히 아빠는 죽지 않았고 또 연명 치료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잘 회복 중이라 했다.


그러나 남동생 부부는 아빠가 수술을 받아 병원에 누워계신 이 와중에 돌잔치를 치러야 하나 고민했다. 돌잔치가 뭐라고 세상 근심을 다 가진 듯 올케는 통화를 할 때마다 우왕좌왕이었다.


"아빠가 죽었으면 장례 치르느라 돌잔치는 당연히 못하는 거지만.

사돈댁도 있고, 너네 지인들도 다 있는데 아빠 한 명 빠진다고 돌잔치를 안 하면 되겠나.

그냥 예정대로 해라. 아빠 못 오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아버님이 처음에 병원에 실려가셨을 때에도, 애 돌잔치만 보고 입원하신다 하셨다는데, 그 소리 듣고 나니까 제가 너무 마음이 안 좋아가지고..."


우리 집에서 제일 착한 우리 올케는 우리 아빠 때문에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 아빠가 없는 돌잔치를 하는 걸 대단한 불효라도 되는 냥 죄스럽게 느끼는 듯했다.


"하이고, 장손한테 해줄 건 하나도 없으면서. 그래도 우리 장손 돌잔치는 보고 싶었는가 배, 영감쟁이가.

됐다마. 돌잔치는 그냥 예정대로 해라. 정 그러면 둘째라도 낳아서 돌잔치 한번 더 하든가."


암만 잘해줘 봐야 시누년은 시누년이라고 나는 농을 섞어도 이렇게 뼈 있는 농을 한다.

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내 주둥이는 좀 그렇다.


"아, 진짜 둘째 생각 없었는데 진짜 낳아야 될까 봐요."


아빠가 살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싶어 이제 여유가 생긴 나는 웃자고 던진 개그인데. 착한 우리 올케는 시누년의 헛소리를 또 다큐로 받고 또 다른 고민을 했다.


"됐다마, 그냥 하는 소리지 너희 나이에 둘째는 무슨 둘째고. 치아라."


조카가 태어난 후 친정 식구들의 가족사진이 없어서 돌잔치 사진을 가족사진 삼아 걸어두고 싶다는 올케의 로망은 안타깝게도 아빠의 심장 수술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엄마의 병수발을 받으며 계셨고 엄마도 간병인 코로나예방수칙으로 인해 꼼짝없이 갇힌 몸이 되었다.

돌잔치 참석을 위해 가족 모두 부산에 내려간 주말에야 나는 수술을 끝내고 살아 돌아온 아빠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가슴 한가운데를 20센티미터 넘게 찢고 수술을 하고 남은 것은 흉터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몸이 얼마나 안 좋았던지 수술 직후 욕창이 생겨 한참을 낫지 않아 고생하셨다.

또 잠시동안은 방과에 피가 잘 돌지 않아서인지 소변줄 탓인지 배뇨장애도 겪으셨다.

그러나 수술 후 아빠의 몸에 나타난 이상징후이자 가장 큰 문제는 오른쪽 발목 아래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근데 와 내 발에 힘이 안들어가고 이리 축 쳐지노?"


동생이 의료진으로부터 수술 전 그리고 수술 후 결과 안내를 받을 때 이미 들었었다.

대동맥이 터져 피가 공급되지 않는 부위에 따라 후유증이 어디든지 어떻게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수술실에 들어가보니 아빠는 심장대동맥류가 터져 오른쪽 다리로 가는 혈관에 피가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했다.

그래서 급하게 왼쪽 다리의 혈관과 오른쪽 다리 혈관을 인공혈관으로 이어 일단 피가 통하게 했다고 했다.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우리가족들은 잠시 피가 통하지 않았던 이유로 오른쪽 다리가 저리고 아픈 줄로만 알았지, 설마 아빠가 진짜 다리병신이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인공 혈관을 잇는 수술 과정에서 신경을 잘못 건들인 것 같다고 신경외과와 재활의학과에서 이야기했다.


아빠는 오른쪽 발목 밑을 쓸 수 없어 한동안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보다 더 엉성하게 걸었다. 그것도 보조기구를 이용하여서 말이다.


멀쩡히 내 발로 119 타고 들어와 심장 수술을 한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자 아빠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되었다.


"아니, 심장을 수술을 했는데 다리를 못쓰는 게 말이 되냐고!"



이렇게 아빠의 생물학적 생명은 수술로 겨우 이어놓았지만, 아빠는 이 수술로 다리병신이 되어 사회적 목숨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평생 밟아왔던 미싱의 페달도 자동차의 페달도 밟을 수 없게 됐다.



아빠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가진 것은 없어도 남한테 없어 보이는 거 싫어하고 자기 자신을 가장 중시 여기시는 분이다.

한평생 3D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것에는 아낌없이 빚을 내서라도 쓰던 분이셨다.

사람도 좋아해서 모임도 좋아하고 술도 약하면서 술자리는 술값 내는 재미로 다니시던 분이셨다.


그렇게 살아온 아빠는 자신의 변화된 몸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을 무척 자존심 상해하셨다. 그 많던 모임도 모두 탈회를 하고 만나자는 사람들도 핑계를 대가며 모두 거절하셨다.


재활 운동만 잘하면 다리가 멀쩡해질 줄 알고 1년을 집에서 죽자 사자 애쓰셨다. 그 덕에 지금은 절뚝이긴 해도 짧은 거리는 지팡이 없이 걸어다니 실 수 있게 되었다.


산을 그리 오르내리던 등산애호가가 산은 쳐다만 봐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 누구도 이러한 결과를 책임을 져주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다른 병원에서는 이제와 손 쓸 방법이 없으니 재활 운동 열심히 하라고 했다.


재활 운동을 하고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아빠는 하셨던 일도 모두 정리했고 가장이 된 엄마에게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새로 산지 1년밖에 안된 새 차를 팔았고, 운전 할 수도 없었다. 생계를 책임져줄 엄마가 없으면 혼자서 살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렇게 심장수술로 거의 모든 걸 잃게 된 아빠에게 남은 것은 경증 장애인 등록증 하나뿐이다.


멀쩡히 살다 한순간에 다리병신이 되어버린 아빠의 좌절감을 어느 누가 알아줄까.


가족마저도 "살아있는 것에 그저 감사하라" 하는데.


원망하고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없으니 화가 나도 혼자 삭혀야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아빠가 겉보기에도 유난히 늙고 초라해졌다.


누구의 도움 없이 병원 내에 있는 기관을 통해 의료분쟁 소송을 제기하셨다했다. 그렇게라도 분풀이를 하셔서 맘이 좀 나아질 수 있다면 하시라며 그냥 두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인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빠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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