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역에서 만난 나의 종착역
스물다섯,
누군가에게 환승연애라는 상처를 안겨줬다.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는 말들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절실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려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수능을 마치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키 158cm에 77kg이었던 나는
3개월 만에 20kg를 감량했고,
대학교 입학 후, 내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학업도 열심히, 동아리 생활도 열정적으로,
연애도 뜨겁게 했다.
1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 계획을 세우게 됐고,
1년 휴학을 하며 어학연수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 과정에서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하게 되어
어학연수를 포기,
휴학기간을 아르바이트만 하며 보냈고,
학교로 복학했다.
학교생활은 예전 같지 않았다.
남들은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인턴쉽에 영어공부에 스펙을 쌓을 때
(참고로 나는 호텔경영학과를 전공했다.)
나는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와 연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시간을 버리는 일인지 몰랐지만.
연애사업도 마찬가지.
2주년 기념일, 이벤트를 위해 자리를 비운
남자친구의 휴대폰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아, 그때 그걸 왜 봤을까? 남의 메시지를...)
남자친구의 여자동기로부터 온 메시지에는
이제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그 여자선배에게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끝냈어야 했지만, 너무 어렸던 나는
남자친구의 이메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많은 이메일들이 넘쳐났고,
대부분의 내용은 이랬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어. 이래서는 안 돼.>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따지지 못했다.
그리고 헤어지지도 못했다. 방법을 몰랐다.
혹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했던가?
그 뒤로 그의 이메일을 뒤지는 일도 없었다.
잊고 싶었던 것도 같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내게는 권태가 찾아왔고,
그렇게 사랑 없이 책임만 있는 연애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배려와 사랑이 버거워졌고,
나는 그걸 짜증과 분노로 표출했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화가 났고,
밥 먹는 모습조차도 보기 싫어질 때가 많았다.
모자란 나는 여전히 헤어지는 법을 몰랐다.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연애를 이어가던 어느 날,
지금의 남편이 나타났다.
내 지옥 같은 연애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단단해 보였던 남편.
당시 남자친구와 너무나도 대비되던
유머 넘치는 상남자 스타일의 남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다.
누나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내던 어느 날,
아수라장 같은 아르바이트 현장 속에서
자신의 일을 빠르고 정확하고, 묵묵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불현듯 그가 남자로 보였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려 하면 할수록
좋아하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내게 오래전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고민 끝에 그에게 내 마음을 전했고,
남편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지금 남자친구 정리하고 나한테 와.
내가 남자친구 만나볼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정리할게."
어렸다는 말로는 합리화가 되지 않겠지만,
남자친구와 관계 정리를 먼저 하고
남편에게 내 마음을 전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뒤늦게 깨달았다.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다른 남자가 생겼노라고.
그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나는 매달리는 그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매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염치로 그렇게 당당했는지)
그렇게 스물다섯의 어느 여름날,
구남자 친구역에서 현남편역이라는 곳으로 환승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부채감은
생각보다 오랜 기간 나를 따라다녔다.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쏘면서 힘들었던
시간들도 있었으리라.
상처를 받은 쪽에 비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부채감을 안고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건
바로 나 자신.
구남친과의 관계가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서히 침몰하는 과정이었다면,
새남친으로의 환승은 나라는 사람을
푸릇푸릇 육지에 꼿꼿이 세워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테다. 하지만 그 흉터 덕분에 나는
내가 남편과 함께 할 때 가장 나다워진다는 것을,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남편을 만난 이후로도 나는
남편에게 이끌려 그저 육지로 가면 될 것을
침몰하는 배 위에서 많이도 휘청거렸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과거의 내 선택을 정당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그 사람에게 분명히 큰 상처를 줬고,
그건 되돌릴 수 없는 나의 잘못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전히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멘탈에
휘청거리다 못해 바닥에 닿을 만큼 쓰러질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깨지지 않는 방법을,
다시 꼿꼿이 서는 방법을 남편을 통해
오늘도 배우며 내 삶이 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굳게 믿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