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늘 그랬듯
정신없이 방학숙제에 허덕이고 있었다.
매일 매일 일기를 쓰라고
엄마가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맨날 맨날 미루다가, 개학하기 며칠 전부터
"엄마! 7월 30일 날씨가 어땠어?"
"엄마! 우리 외가 간 날이 언제야?"
하며 엄마를 내내 귀찮게 했었다.
그 중에서도 벼락치기로 하기에
제일 버거웠던 숙제들이
‘부레옥잠 키우기’, ‘고구마 심기’
뭐 이런 것들이었다.
‘이걸 언제 다 하지......’ 하며 머리를 굴렸었는데
그 와중에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숙제가 있었다.
‘크레파스로 초 만들기’
크레파스를 녹여서 형틀에 넣으면 응고가 되며
초가 완성되는 재미있는 과제였다.
들뜨고 신이 난 마음에 호들갑을 떨면서
좁은 부엌이 꽉 차게 판을 벌리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색을 꺼냈다.
빨강, 분홍, 파랑, 청록, 노랑 등등
다채로운 색의 크레파스들을 정렬하면서
나는 설레는 마음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엄마는 옆에서 지켜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베뜨야, 그렇게 많이 넣으면 색이 안 예뻐질 거야. 하나씩 하는 게 어떨까?”
라고 했지만,
난 예쁜 초가 나올 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아니라고 우기며
기어코 다 넣어서 만들기 시작했다.
결과는
똥색이었다.
정말 좀처럼 보기 힘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각한 똥색.
보자마자 울상이 된 나를 보며
엄마는 귀엽다는 듯이 내 어깨를 안고 말했다.
"베뜨야, 아주 아주 예쁜 색들도너무 많이 섞이면,
이렇게 자기 색을 잃어버리고
음....... 이런 색이 나오는 거야.
경험해 봤으니까 이제 알겠지?
그럼 됐어. 엄마랑 하나하나 다시 해 보자."
그렇게 엄마랑 하나씩, 두 개씩 크레파스를 섞어가며
초를 만들어 나갔고,
난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잘해보겠다는 욕심에 일을 너무 많이 벌려서
쓰러질 듯이 힘들 때,
세상의 어려움이 너무나 다양한 갈래를 통해
뭉쳐서 나에게 다가올 때,
모든 것들을 껴안고 가겠다고
손 안에 흩어지는 모래알을 한 번에 움켜쥐듯
자꾸만 나에게 상처를 주는 나를 볼 때,
그 크레파스 초가 생각난다.
지금 내가 놓아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그날 초를 만들던 냄새와
엄마가 웃으며 나를 안아주던 그 장면이
가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따뜻한 촛불과 같은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글ㅣ이베뜨
일러스트ㅣ이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