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천재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한 혐의로 한 청년이 체포된다. 실업자였던 그는 마흐말바프를 자칭해 영화를 찍어주겠다며 어느 가정에 발을 들인다. 얼마 못 가 그는 체포되고 꽤나 기이한 사건으로 판명돼 이 일은 한 잡지사 기자의 먹잇감이 된다. 범행 기사가 인쇄된 잡지는 우후죽순 쏟아지고 그 기사를 어떤 영화감독이 읽게 된다. 사건에 흥미를 느낀 그는 범행을 저지른 청년 사브지안을 면회하는 동안 그로부터 이 일을 영화로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흔쾌히 받아들인 감독은 촬영 준비를 시작한다.
특종을 취재하러 나선 기자
영화는 경찰들과 기자, 택시 기사의 동행으로 시작한다. 흔한 범죄물처럼 보이는 도입부는 범죄 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기자와 택시 기사의 만담을 찍는다. 여기엔 범행을 쫓는 수사의 박진감은 없다. 뒷좌석에 앉은 경찰들은 무기력하다. 그들은 상부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나온 사람들 같다. 택시 기사가 그들보다 생기 있어 보인다. 범죄 영화가 갖는 기존 공식에서 탈피한 오프닝이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관객은 이 영화가 어쨌든 범죄라는 장르와 긴밀하게 연결돼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범행 현장에 도착하면 기자와 경찰은 작전까지 세운다. 기자 본인이 범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들어가면 경찰이 따라들어와 범인을 잡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기자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택시에 앉아 있는 기사와 경찰들의 대화 장면을 오랫동안 찍는다.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 장면은 카메라 밖으로 치우고 대신 그들의 잡담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예고한다.
현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자는 이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조건이라면 영화의 바탕이 되는 사칭 사건을 선점하는 이는 기자 본인이어야 한다. 뉴스 기사와 기자가 바라는 영화엔 공통점이 있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에서 말했듯 그것은 상황과 결과만 남아 함부로 소비될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뉴스는 원인을 잘라낸 뒤 상황과 결과만 대충 보여주고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는 매체다. 그렇다면 영화는? 기자가 바라는 영화는 이런 것이겠다. 사브지안이 유명 감독을 사칭하는 상황과 경찰에게 그가 붙잡히는 결과를 보여주는 영화. 뉴스와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 역시 원인을 잘라냄으로써 관객이 보기에 심적으로 편안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원인을 보여준다는 건 당사자의 사정을 듣는다는 말인데, 관객 내지 시청자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영화는 내가 거기 없음으로써 성립되는 동일화이다. - 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中
<클로즈 업>은 뉴스나 특정한 영화들이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에서 벗어난다. 앞서 기자의 꽁무니 대신 기사와 경찰들의 대화 쇼트를 찍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뒤에 무슨 전개 방식을 고집할지 미리 밝히고 있다.
사브지안
<클로즈 업>의 대부분 시퀀스는 재판장에서 이루어진다. (영화 속)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재판관의 동의 아래 재판장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실제 사건의 범인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사브지안은 만들어진 모의재판에서 열연을 펼친다. 재판관 혹은 키아로스타미 감독 앞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감독을 사칭한 이유와 그 시간 동안 짤막하게 느낀 기쁨의 순간을 회고한다. 실업자 신세인 본인이 유명 감독을 연기하며 사람들과 어우러질 수 있던 시간의 행복을 재판관이 아닌 감독 앞에서 고백한다. 카메라가 없는 실제 재판이었다면 얘기하지 못 했을 자기 속내를 감독 앞에서 훌훌 털어놓는다.
재판 시퀀스들 사이에는 다른 시퀀스가 두 개 끼워져 있다. 하나는 버스에서 만난 아한카흐 부인 옆에서 사브지안이 유명 감독을 연기한다. 아한카흐네와 사브지안의 잘못된 만남이 시작된다. 그녀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브지안이 읽던 유명 감독 시나리오에 그의 싸인까지 받는다. 이 시퀀스는 그가 키아로스타미한테 영화 제작을 부탁한 이후에 나온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인을 포함한 아한카흐네 역시 영화 출연에 동의했다는 뜻이다. 이 시퀀스는 사브지안 혹은 부인의 플래시백(회상)이 아닌 키아로스타미 감독과 그들의 협조 아래 찍힌 것이다. 그에게 실제로 사칭 피해를 당했지만 아한카흐네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출연 제안까지 받아들인다.
사브지안과 얘기를 나누는 아한카흐 부인
두 번째 시퀀스에선 사브지안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아한카흐네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열연을 펼친다. 아한카흐 씨는 신문에서 마흐말바프의 수상 소식을 듣고 (마흐말바프로 위장한) 사브지안에게 축하 표시를 한다. 기사를 못 본 사브지안은 말뜻을 이해할 수 없다. 영화감독이 자기 수상 소식을 몰라? 거두지 못한 그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경찰을 미리 불러놓은 아한카흐 씨는 영화를 찍으러 온 사브지안을 앉혀놓고 자연스레 대화를 나눈다. 아한카흐 부인은 식사를 대접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연기와 그 속에서 사브지안을 속이기 위해 펼치는 또 다른 연기. 연기 속의 연기. 더 넓게 보면 영화 속의 영화.
두 번째 시퀀스에서 어떤 순간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잡지 기자가 아한카흐네 집에 온다. 기자는 도입부에서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영화 안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출연했다. 영화 속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가 아닌 영화 밖의 카메라에서 움직이는 줄 알았던 기자는 이 시퀀스에서 영화 안과 밖 문지방을 가볍게 넘는다. 우리는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혼자 움직이는 줄 알았던 기자도 (영화 속) 감독과 손을 맞잡은 사이라는 걸. 특종에만 눈이 먼 줄 알았던 그도 알고 보면 사브지안을 포용하고자 나타난 또 한 명의 배우라는 걸.
사브지안을 포용하는 수많은 배우와 함께 (영화 밖) 키아로스타미는 이 장면에서 세상의 모든 배우들을 포용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연기하는 사브지안, 기자, 아한카흐네 가족, 택시 기사, 경찰, 또는 <클로즈 업>을 보는 영화 밖에서 나 자신을 연기하며 사는 관객까지도.
경찰이 온다. 사브지안의 시점
영화라는 매체는 스크린 속의 사건을 엿보며 관객들에게 관음증적 쾌락을 제공한다. 사브지안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엿보게 된다. 영화 속 창문은 감독들에게 이차프레임으로써의 도구로 활용도가 높다. (영화 밖) 키아로스타미는 창문과 그에 드리운 커튼을 통해 영화(<클로즈 업>) 속 영화(창문)라는 구도를 만든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 사브지안은 수많은 배우들이 만든 (작전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영화를 통해 경찰에게 잡히고 만다.
경찰이 집에 들어오면서 카메라의 위치도 바뀐다. 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트래킹한다. 쇼트와 쇼트의 구분 없이 죽 수평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오른쪽에 있던 경찰들이 왼쪽 거실에 있는 사브지안을 체포한다. 끌려나온 사브지안을 이번에도 카메라는 창문을 통해 찍는다(아한카흐 씨의 지인 모흐세니의 시점으로). 영화와 실제를 구분지어주던 커튼은 영화와 또 다른 영화가 뒤섞이자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된다. 창문을 가리던 커튼은 바람에 날라가고 관객은 프레임과 프레임이 혼합된 장면을 목격한다. 영화 바깥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와 실제는 과연 정확한 구분이 가능한지 관객들에게 묻는다.
버려진 꽃을 줍는 택시 기사
용서를 받았지만 법의 심판에 따라 사브지안은 며칠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며칠 뒤 그는 석방하는 도중 자신이 존경하는 마흐말바프 감독을 만난다. 사브지안은 감격에 젖어 흐느낀다. 이 순간이 미리 써놓은 시나리오인지 그를 위한 키아로스타미의 깜짝 선물인지는 모른다. 시나리오든 실제 상황이든 무슨 상관이랴.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영화와 같은 현실인데. 그냥 이 순간을 즐기면 된다.
도입부에서 기자와 경찰들을 기다리며 택시 기사는 버려진 꽃을 줍는다. 이유는 없지만 주운 꽃을 그는 택시 앞유리창 뒤에 가지런히 놓는다. 버려진 꽃들은 상당히 아름다운 색을 띄고 있다. 택시기사는 이유 없이 그 꽃을 줍는다. 사브지안은 유명 감독 마흐말바프의 인생이 아름다워 보여 그의 삶을 연기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저절로 손이 가듯, 아름다운 인생에 잠시 몸을 던지는 것도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일까. 그 욕망을 실현한 사브지안을 비난하는 대신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따뜻하게 그를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