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2014
1945년. 넬리는 수용소에서 얼굴에 총을 맞는다. 살아남은 그녀는 안면에 생긴 총상으로 결국 성형수술을 받는다. 이전과 다른 얼굴을 들고 남편 조니를 찾으러 간 그녀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남편을, 또 그의 속셈을 마주한다. 그는 얼굴이 변한 넬리에게 죽은 아내 '넬리'를 연기해달라고 제안한다. 죽은 아내의 유산을 착복하려는 그의 계략은 넬리에게 실망감은커녕 어떤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볼 거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역사적 재난으로 인간적인 가치가 변질된 곳에서 넬리는 순수한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 속 독일은 보이는 게 전부인 곳이다. 차림새로 판단해 돈이 많아 보이면 일단 갈취한다. 남자 손님은 넬리가 술집 여자처럼 보여 호의랍시고 담배를 물린다. 조니는 넬리가 죽은(줄 아는 예전 아내) 넬리처럼 보여 아내 행세를 부탁한다. 넬리는 그의 지시를 따른다. 그는 넬리에게 (죽은 줄 아는) 넬리의 필체, 화장법과 옷차림, 머리 스타일까지 (죽은 줄 아는) 그녀와 유사하게 만든다.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필체마저 당연히 똑닮았지만 조니는 목표 달성에만 몰두하지 눈앞에 존재하는 넬리에겐 눈독을 안 들인다. 가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지만 그뿐이다.
넬리의 집에는 장롱거울이 있다. 거울은 자기 형상과 실존을 자각할 수 있는 물건이다. 수용소에서 막 돌아온 그녀의 몸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의 아픈 일들과 조니에게 받아야 했던 사랑의 결여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 술집에서 그를 마주친 그녀는 장롱거울에 온몸을 밀착한다. 성형으로 개조됐지만 나의 형상은 사랑하는 이에 다시금 가까워질 것이다. 형상 따위 몰라봐도 좋다. 실존하는 지금의 나를 알아보고 껴안아주기만 하면 된다.
조니의 집에는 거울이 없다. 그곳에서는 그가 곧 거울이다. 넬리는 자신을 차차 알아보게 될 조니의 반응을 확인만 하면 된다. (죽은 줄 아는) 넬리와 그녀의 형태가 닮아갈수록 그는 아연실색한다. 하지만 이곳은 2차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독일. 보이는 것이 곧 전부인 세상이다. 그녀는 죽은 아내와 닮은 가면일 뿐이다. 한 발 가까워지면 한 발 멀어지고 마는 조니에게 실망해 넬리는 눈물을 흘린다. 조니는 그녀의 실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희뿌연 거울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넬리 역시 조니의 욕망을 투시하지 못한 거울이다. 영화 초반 넬리의 친구 빈터와 관객은 조니가 유산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안다. 넬리를 밀고하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왔다. 아내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일방적으로 이혼통지서를 쓴다. 이 사실을 넬리에게 숨겼던 빈터는 죄책감이 들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자살한다. 넬리는 편지를 읽는다. 그전까지 넬리가 무수히 시도한 그와의 교감은 애초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진작에 그는 그녀의 전(前) 남편이었다. 돈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냉혈한이었다. 넬리는 이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빈터의 만류에도 부정했다. 돈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못 본 조니와, 이미 변해버린 그와의 재결합을 꿈꿨던 넬리는 앞에 있는 서로의 실존하는 욕망을 보지 못한 거울이다.
넬리는 자신이 변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와 이어질 수 있었던 끈은 모두 잘리고 뒤에는 그녀 혼자 헤쳐나가야 할 길만 남았다. 작별 인사로 넬리는 노래를 부른다. "시간은 이렇게 긴데, 사랑은 너무나 짧아. ...늦었어. 그대여 늦었어." 가수였던 넬리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조니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넬리는 옷을 챙기고 나간다. 넬리가 나가고 그 남은 여백을 흐릿하게 초점 없이 비추는 카메라. 넬리와 조니 사이에 생긴 투명한 벽. 이것은 넬리 스스로가 지은 마음의 벽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조니는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