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은 회사에서 받은 휴가를 잘 보내고 싶다. 같이 여행 갈 사람을 구해보지만 누구는 갑자기 약속을 파토내고 누구는 시간이 없다 하고, 남자친구는 바쁘다며 약속을 피한다. 외로워진 델핀은 친구네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지만 그들은 무례하다. 졸지에 왕따를 당한 그녀는 거센 바람이 부는 풀밭에서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과의 가벼운 접촉마저 그녀에게는 늘 난제다.
발을 딛기 어려운 세상에도 살만한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가진 믿음에서 비롯된다. 종교가 도외시되는 21세기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믿는다. 미신을 믿고 지인과 동료를 믿고 누군가는 우연을 믿는다. 그 대상에 깃들어 있는 신성함이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하기보단,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신성함을 부여한다. 델핀 역시도 무언가를 믿는다. "녹색이 올해의 색이래... 그때부터 내가 주운 건 모두 녹색이었어." 늘 좋은 인연을 기다리는 낭만주의자 델핀은 자신과 녹색이 연관된 모든 우연을 좋은 징조라 생각했지만, 그동안에 만난 사람들은 그녀와 상극이었다. 델핀이 눈물을 흘린 장소가 녹색이 점령한 숲이라는 사실은, 희망고문만 시키고 기적은 가져오지 않는 녹색에 대한 일말의 배신감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핀은 체념하기보단 방황을 택한다. 우선은 움직이고 활동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누군가 나타나겠지. 그렇지만 담배를 권하면서 껄렁대는 남자는 지나친다. 단적으로 이 씬은 그녀에게 올곧은 심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외롭다 한들 그녀가 아무나 받아줄 만큼 유약한 영혼을 지니진 않았다. 보다 제대로 된 인연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남들보다 외로움을 오래 타는 중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은 <녹색 광선>에서 바다와 산, 델핀이 오르는 바위와 숲에 불어닥치는 바람, 심지어 흐린 하늘까지도 수직으로 찍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이상하리만치 맑은 하늘과 태양에는 눈길도 안 준다. 햇빛이 눈부셔서였을까? 그렇다기엔 영화 말미에 들어 델핀이 우연히 만난 남자와 힘께 바라보는 노을진 태양은 어떻게 설명할까?
<녹색 광선>은 일기 형식으로 만든 영화다. 보통 일기에는 그날의 날씨를 표시할 수 있는 칸이 있고 델핀이 쓴 일기에는 맑은 날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델핀이 휴가를 보낸 곳들은 태양이 쨍쨍하지만 그녀가 쓴 일기들은 한없이 우울하고 답답하다. 보는 사람에게까지 밀려오는 답답함의 이유는 한 가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델핀은 잠에 든 적이 없다. 일기란 무엇인가? 일기는 시나리오나 소설과는 달리 구체적인 서사 형식이 없어 시작과 끝을 불명확하게 적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소설 속 인물처럼 잠에 든 후에 다음 날을 맞아야 할 만큼 시간의 개연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영화(일기) 속 델핀의 시간은 줄곧 아침 혹은 낮이다. 땅에 발을 딛고 선 그녀의 시간에 저녁과 밤은 다른 세상에나 존재할 법하다. 자연 경관을 다 보여줘도 로메르가 대낮의 태양에는 등돌린 이유. 태양은 그녀를 두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녀를 가두고 거기 정지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창이다. 시간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에서 태양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자연이 아니라 델핀을 가둔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태양만 떠 있는 세상에서 델핀이 사는 방법은 녹색에 대한 믿음 뿐이다. 그 믿음이 현실에 구현될 때에야 비로소 델핀의 머리 위로 밤하늘이 생겨날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사람은커녕 어떤 무생물에게조차 믿음을 져버린다면 인간은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불신으로 눈물을 흘리던 델핀에게는 다행히 녹색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덕에 카드를 주웠고, 녹색 전단지를 봤고, '녹색 광선'(le rayon vert)이라 써진 간판을 봤고, 비로소 찾아온 인연과 함께 녹색 광선을 봤다. 드디어 현실에서 그녀가 바라던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델핀에게 찾아온 이 믿음과 우연의 연속은 누가 가져다 준 걸까? 단순히 델핀의 운명이 가져다줬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녹색 광선>은 영화 음악을 최소한으로만 쓰는데, 델핀이 어떤 우연과 마주할 때마다 로메르 감독은 영화 바깥에서 음악을 튼다. 델핀의 일기를 훔쳐보던 관객은 음악이 개입하는 순간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일기 속 우연의 제공자는 그녀의 사적인 운명이 아니라 <녹색 광선>이라는, 로메르 감독은 이 사실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일깨운다.
영화는 주위가 어둑해져야 빛을 발산할 수 있는 예술 매체다. 때문에 극장은 어두워야 한다. 관객들은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는다. 델핀은 그러지 않았다. 늘 돌아다녔고 그때마다 날씨는 화창해 어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녹색 광선과 조우할 때 그녀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감상하기 위해 앉는다. 영화를 감상하듯, 그녀와 남자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본다. 태양을 찍을 때 <녹색 광선>은 음악을 틈과 동시에 처음으로 장면 전환을 달리 한다. 마치 이제부터 새로운 영화가 시작될 것처럼. 그리고 델핀은 녹색 광선을 본다. 해가 저문다. 저녁이 찾아온다. 델핀은 태양으로 지은 철창에서 드디어 탈출한다. 기적이 그녀의 몸을 관통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영화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1시간 40분 동안 본 것은 델핀의 일기일 뿐이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오르고 영화 음악도 멈추면 델핀의 영화(저녁)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화를 볼 수 없다. 관람자도 없고 그 이후 델핀의 삶을 찍어줄 감독도 없기에 그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고, 그렇기에 <녹색 광선>은 희극이다. 더 이상 <녹색 광선>이 델핀에게 제공할 기적은 없다. 델핀은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고 그때마다 난제들과 부딪히겠지만, 이미 한 번의 기적이 통과한 몸이기에 델핀은 강해졌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