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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Dec 08. 2022

이건 노인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제목만 보면 다 늙은 노인이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고 앞질러가는 세상에 내놓는 절규 내지 한탄처럼 보인다. 놀랍게도 실제로 그렇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노인'을 맡은 벨은 흉흉해진 요즘 세상을 안타깝게 본다. 오프닝 또한 그런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틈만 나면 그는 세상 일에 혀를 차기 일쑤다. 흔히 꼰대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어떻게 보면 별로 중요한 인물 같지도 않다. 사건 전개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따로 있으니 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초반을 보면서 종종 관객과 겹치는 시선은 모스의 것이다. 모스의 시선을 따라 영화는 다음 쇼트를 시점 숏으로 바꾸면서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탐내는지 금방 알게 된다. 모스는 욕망 덩어리다. 갈취하는 대상과 함께 그 대상을 향해 가는 여정 또한 즐기는 자다.

  안톤 쉬거도 마찬가지다. 그가 모스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카메라는 종종 그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욕망을 따라가는 두 남자의 눈은 위험을 결코 기피하지 않는 모험심으로 활활 타오른다. 하나 무서운 점은 우리는 모스의 가정사 같은 그의 출처는 알지만 안톤 쉬거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그는 불분명한 출신을 자랑하는 사이코패스다. 많은 경우에서 안톤 쉬거를 하나의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라고 치부하는 해석은 조금 성급하지 않나 싶다. 필자는 되려 사이코패스인 그 역시도 욕망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에 소름이 돋는다. 스스로를 인간 앞에 닥쳐온 운명이라 생각하며 동전을 던지는 신인 척 하는 인간. 쉬거가 운명의 소용돌이 자체라면 코엔 형제는 그가 다리에 박힌 실탄을 빼내는 데 열중인 시퀀스를 왜 자세히 보여주고 있나. 인간을 쫓는 운명이자 절대자인 존재가 어떻게 부상을 당할까. 약국에서 치료약을 훔치기 위해 애꿏은 자가용을 폭파시키는 노력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안톤 쉬거는 차라리 신인 척하는 사이코패스다. 코엔 형제는 이를 놓치지 않고 안톤 쉬거에 대한 시점 쇼트를 내놓는다. 그 역시 한 명의 (나약한) 인간으로서 감정은 없지만 욕망만은 충분히 갖고 있는 자다.

영화에는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주인공이 있다. 앞서 말했던 늙은 보안관 벨이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그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오프닝은 벨의 나레이션과 함께 그가 사는 마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쇼트들로 이뤄진다. 그는 말투는 모든 욕구를 내려놓은 듯하다. 엔딩은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꿈 이야기다. 그의 꿈을 우리는 그의 목소리로만 듣는다. 코엔 형제는 그의 꿈을 따로 영상화하는 대신 벨의 씁쓸한 얼굴만을 찍는다.

  돈가방을 사수하려는 모스와 한 가정을 몰살하려는 안톤 쉬거와 달리 우리는 벨의 시점 숏을 볼 수 없다. 그는 모스와 안톤 쉬거가 지나온 곳에 가장 늦게 오는 인물이다. 오랜 직장에서 얻은 연륜으로 사태는 금방 파악하지만 수사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다. 벨은 욕망의 눈을 잃거나 스스로 내던진 이다.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세상에서 터진 범죄엔 더욱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런 그에게 한 차례 시점 숏이 잡힐 때가 있다. 모스가 사망한 곳에서 사건이 터질 때다. 벨은 범인을 잡을 기회를 잡으려 현장으로 달려가지만 범인은 이미 물러나고 없다. 벨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다. 이후 그는 자기가 오래 몸담아온 보안관 자리에서 은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벨은 제목 그대로 시대를 뒤따라가지 못한 채 세상에 한탄이나 하는 노인으로 볼 수 있겠다.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혹자 말대로 제목을 바꿔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봄직하다. 과연 이 세상이 노인을 배척한 적이나 있고 혹은 이 세상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나 있을까?

벨은 이 사건(혹은 이 세상)과 엮이고 싶지 않다. 그는 진전 없는 수사에 매달리기는커녕 편안히 신문이나 볼 뿐이다. 오프닝을 보자. 코엔 형제는 벨의 나레이션과 함께 그가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 곳곳을 쇼트로 나눠 찍는다. 쇼트들은 왜 필요했나. 다시 물어보자. 이 쇼트들은 누구의 시점인가. 어쩌면 오래 동경해 온 보안관으로 몇 십 년을 일하면서 삶의 덧없음을 느껴 그간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한 노인의 시점이 아닐까. 오래 짊어진 욕망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삶에 초연해진 자의 시선이 아닐까. 이미 자기는 이 세상에 등을 돌릴 채비인데, 마침 나레이션이 끝나기 직전에 안톤 쉬거라는 성가신 인물이 등장했고, 벨은 직업적 책무 때문에 그 사건에 또 참여했을 뿐이다.

  차라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문장은 나라(Country)가 노인을 배척하기 보다, 다 늙어버린 인간이 비로소 이 욕망의 나라에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쪽에 가깝다. 젊은 축에 끼는 모스와 안톤 쉬거는 총기를 난사하며 밤거리를 자신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디스토피아로 만든다. 죄없는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서로를 끝까지 물고 느는 두 인물은 욕망에 휘둘리면서 그에 따르는 모험을 피하지 않는다. 반면 벨은 직업적 사명감도 없고 개인적 일탈의 욕구도 없다. 그가 단순히 늙어서일까. 늙으면 스스로 욕망을 벗어던지고 초연해질 힘이 생기나. 여기엔 인간의 운명으로 형상화됐다는 안톤 쉬거의 존재보다 거대하면서도 비가시적인 인간의 섭리가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았나.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하는 거라고.  역시 길을 걸을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내려놓는  아닐까. 그 두고 가는 것 중에는 자신이 죽어서도 여전히 남아있을 이 세상을 향한 관심이 아닐까. 그것은 꿈 속에 나타났다는 자기 부친의 길을 따라가기 위한 의례일 것이다. 벨은 이 섭리를 지금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그 환영의 방식을 정하기도 전에 운명은 인간보다 한발 앞선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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