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2010 (2)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대화에 빠져들 즈음 여주인은 창밖에서 전화를 받는 제임스를 향해 말한다. "수염만 깎았으면 완벽할 텐데요." 그녀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제임스에게 닿지 않는다. 자신이 온전히 제임스로만 있는 줄 아는 창밖의 그와, (제임스와 엘르라는) 부부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가게 안에서, 여주인의 한 마디는 두 공간에 나뉘어 있던 경계를 선명히 보여준다. 또한 이 장면은 사진1에서 29번 손님을 찾던 직원의 공허한 외침을 상기시킨다. 직원의 외침은 여주인과 달리 왜 공허했나. 카페에서의 제임스처럼 그녀 또한 사적인 일(흡연)로 창밖에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엘르와 아들은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고, 엘르와 제임스는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엘르와 아들은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도 전에 엘르가 먼저 자리를 뜬다. 따라서 그들을 부를 사람은 직원 밖에 남지 않는다(물론 직원은 자기 일 하느라 바빠 그들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다). 반면 제임스와 엘르의 대화는, (부부 사이에 나눌 법한 대화가 아닌데도) 둘의 관계를 오해하게끔 만든 그들의 진중함은 한 명의 관객을 낳았다. 그 관객은 카페에서의 두 사람이 부부임을 알기에(혹은 믿기에), 자기 일에 열중한 창밖의 남자를 응시한다. 그 덕에 제임스는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창문에 갇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엘르와 달리).
4. 변해가는 제임스
때문에 카페에 나와서도 그녀의 연기는 끝나지 않는다. 아들과 전화를 하던 엘르가 느닷없이 제임스를 보며 핀잔을 놓는다. 엘르의 그것은 작가 제임스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남편 제임스에게 하는 말이다. 안에서 끝날 줄 알았던 역할놀이를 그녀는 밖으로 끌고 온다. 제임스는 조금 받아주다가도 영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들은 어떤 조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엔 신혼부부를 위해 결혼사진을 찍어주는 코스가 있다. 이 코스에 먼저 엘르가 들어간다. 그 앞에서 망설이던 제임스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엘르는 그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 신혼부부에게 자신과 제임스가 15년을 부부로 살았다고 소개한 것이다. 신혼부부 쪽 신랑이 그들과 함께 촬영을 권유한다. 몇 번 거절하던 그는 신부의 손에 이끌려 사진을 찍는다. 카페에서 제임스의 아내로 오해받던 엘르는 이제 신혼부부 앞에서 15년 차 부부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제 부부의 탈을 쓰고 걸어다니며 타인에게 말을 건다. 신혼부부는 이 위장 부부가 처음으로 말을 건 상대다. 그들은 그렇게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온다.
제임스는 다시 작가로서의 본인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해탈한 듯한 엘르는 제임스의 어떤 말에도 시큰둥하다. 관계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 둘은 작은 광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조각된 동상을 본다(동상의 전체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으로서 작품을 본 스스로의 감상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 충돌하고, 서로의 감상을 딱히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작품에 감동받기는커녕 서로 말싸움하느라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관객이 되지도, 관객을 연기하지도 못한다.
특히 제임스는 예술 관련 저서를 집필하는 작가임에도 동상을 보고 제대로 된 감상을 밝히지 못한다. 반면에 엘르는 동상을 보고 느꼈던 점을 말한다. 이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뭘까.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그는 상처를 입었을까. 혹은 잠시나마 작가, 또는 관객으로서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싫어하잖아요"라는 대사에서 그 뜻이 얼핏 후자쪽에 있음을 유추해낼 수 있다. 영화 내내 생기있던 그의 얼굴은 지금 상당히 지쳐보인다. 엘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관람객과 얘기를 나눈다.
그때 제임스의 시점(사진7)으로 쇼트가 바뀐다. 부부싸움을 하는지 남편의 목소리는 제삼자가 듣기에도 위압적이다. 근데 남편이 몸을 움직이면 그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다.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면 누구나 오해할 법한 장면이다. 근데 이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카페에서 제임스와 엘르를 보던 여주인. 보는 사람의 오해 때문에 그 상황이 곡해되던 카페 시퀀스와 비슷하다. 이때 카메라는 제임스의 시점으로 부부가 움직이는 모습을 쫓아간다. 이 카메라 렌즈는 제임스의 눈이자 곧 '나'의 눈이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한다. 그는 여기서 쇼트를 바꾸지 않는다. 대신 프레임 바깥에 있던 제임스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때 카메라는 사진7의 시점, 즉 제임스의 시점(이었던 것)으로 죽 이어간다. 원래 제임스와 관객인 '나'의 눈이었던 카메라는 이제 '나'의 눈으로만 남게 된다. '나'와 함께 있던 제임스는 스스로 관객석을 박차고 일어나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관객석에 편하게 앉아만 있던 그도 허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앉아만 있기도 이젠 지치고 피로하다. 그는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배우가 된다.
관객(카페 여주인)의 왜곡으로 탄생한 배우(엘르)가 아니다. 제임스는 스스로 영화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배우를 자처하고 나선다. 이후에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는, 사진7의 남자로부터 조언을 듣는다. 아내 어깨에 손을 얹으라는 조언을 (남편이 된) 제임스는 그대로 실천한다. 아무 말 없이, 식당에 들어가면서 그는 엘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영화 속 현실의 배우가 아닌, 현실이라는 영화 속 두 배우(가 된 사람들)의 교감은 여기서 싹튼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