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던 영화감독을 사칭하다 경찰에 붙잡힌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사브지안이다. 생활의 궁핍함에 지쳐있던 그에겐 영화 감상이 유일한 낙이다. 거기서 그는 한 감독에게 푹 빠져서는 어느 가족한테 자신을 그 감독이라 소개하기까지 이른다. 감독으로 위장한 그는 가족에게 영화를 찍어주겠다며 속이고, 결국 그는 사칭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이런 사브지안에게 호기심을 보인 영화감독이 있다(사브지안이 존경한 감독은 아니다). 그는 사브지안을 배우로 섭외한 뒤 재판 과정을 다시 찍고, 이어 그의 전날 행적을 재연하게 해 이것들을 영화로 남긴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사브지안이 동경하던 감독과 실제로 만나게 해준다. 가히 영화를 통해 이뤄낸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의 제목은 <클로즈 업>(1990)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오늘 다룰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오늘 주제와 다른 영화를 도입부에 꺼낸 이유는, <클로즈 업>을 앞서 언급해둬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쪽에선 영화의 관객이었던 사브지안이 스스로 배우가 된다(클로즈 업). 다른 쪽에선 미술 작품의 관객인 두 남녀가 부부를 연기하기 시작한다(사랑을 카피하다). 두 영화는 이 점에서 같다. 다른 점이라면 사브지안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배우였지만, <사랑을 카피하다> 속 배우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배우가 되어 '생활'한다. 영화 속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 배우를 연기한다. 말이 좀 이상한가? 얼핏 궤변 같아 보이는 말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성립되는지는 천재 감독을 믿고 따라가면 알 수 있다. 더 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 보자.
1. 창문 안에 갇히다
창문 밖(안)에 있는(갇힌) 엘르 (사진1)
제임스의 북 콘서트에 간 엘르는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아들에 못 이겨 식당으로 간다. 나오지 않은 음식을 기다리며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제삼자의 위치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모자지간의 대화다. 이때 엘르는 아들과 말하면서도 수시로 다른 곳에 눈을 둔다. 조금은 시건방진 아들의 말에 대꾸하기 싫어서 눈을 돌렸을 수도 있겠다. 근데 자세히 보면 아들의 등을 진 창문 바깥에 담배를 피는 남자가 있다. 엘르는 얼른 담뱃갑을 들고 밖으로 나가 그에게 불을 빌린다. 그녀는 담배가 피고 싶어서 나갈 타이밍을 계산 중이었다.
영화를 처음 봤던 필자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사랑을 카피하다>를 몇 번씩 돌려보면서 이 식당 씬이 어딘가 의미심장하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다. 유심히 살펴본 관객이면 알겠지만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창문에 있다. 영화의 결말까지 보고 처음으로 되돌아오면 키아로스타미가 창문이 등장하는 순간순간을 세심하게 고려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를 다시 본 사람으로서 사진1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담배를 피고 싶다는 욕망에 못 이겨 29번 손님을 찾는 직원의 부름을 듣지 못한 그녀. 그녀는 이미 창문 밖에서 불을 빌리고 있다. 여기서 직원의 부름을 눈여겨볼 수 있다. 하필 복작대는 식당 안에서 영화가 직원의 목소리를 관객한테까지 들리도록 높여놓은 이유는 뭘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면 엘르는 직원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 결국 그녀가 창밖에서 담배를 피는 쇼트로 사진1의 시퀀스는 끝난다. 이렇게 엘르는 담배 피는 데 여념이 없어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그녀는 창문 안에 갇힌 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녀를 창문 안에 가둔 뒤 쇼트를 바꾼다. 이 다음 쇼트가 엘르의 집으로 제임스가 들어가는 장면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2. 창 밖을 보라, 창 밖을 보라
자동차 밖에 있는 카메라(사진2) 오랜 시간 유지되는 쇼트
엘르의 초대를 받은 제임스가 그녀의 집으로 간다. 잠시 얘기를 나누던 둘은 밖으로 나간다. 그들은 엘르의 차에 타 잠시 드라이브를 한다. 지금 기회에 엘르는 제임스의 책에 사인을 더 받는다. 카메라는 자동차 밖에 있다. 얘기하는 동안 앞유리창으로 반사되는 바깥 풍경이 그들의 얼굴을 계속 훑는다. 이때 '나'는 작가와 독자 간의 대화를 구경하는 입장이다(사진2). 제임스가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죠?" 목적 없이 떠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엘르가 차를 멈추면, 그 즉시 창밖에 있던 카메라는 차 내부로 사뿐히 들어온다(사진3).
그들은 갈 곳을 루치냐노로 정한 뒤 다시 차를 몬다. 이때 '나'는 목적지로 가는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 그들이 정처 없는 배회만 계속했을 때 창밖에서 '나'는 그들을 구경했다. 카메라가 차 내부로 들어왔을 때는 뭐가 달라졌나. 루치냐노로 가는 그들의 대화를 구경하는 카메라가 있다. 단지 그 뿐이다. 근데 창밖 쇼트에서 차 안으로 쇼트가 바뀌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그 사실은 명확하다. '나'가 드디어 창밖의 풍경을 보게 됐다는 점. 키아로스타미가 허락해준 감상의 기회다. 이때 풍경을 보는 주체는 '나'혼자가 아니다. 풍경으로 쇼트가 잠시 바뀔 때의 카메라는 엘르가 모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따른다. "말싸움하느라 경치를 못 즐긴다"는 제임스의 말에 바로 전환되는 풍경 쇼트. 그때 자동차와 함께 움직이는 카메라가 비추는 풍경은 '나'와 함께 차 안에 타고 있던 제임스와 엘르도 같이 보는 것이다. 이때 영화 바깥과 내부에서 규정되는 <관객>과 <배우>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나'는 영화 바깥의 관객에서 영화 내부의 관객이 된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가 영화 속 주인공 제임스와 엘르까지 관객석에 앉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이하다. <사랑을 카피하다>속의 인물들은 온전히 배우로만 있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이었다가 배우가 되고, 배우처럼 보이다가도 누군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분석하는 관객이 된다.
차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사진3)
이들이 루치냐노에 도착해서 미술관에 들어갈 때까지 나눈 대화를 보자. 둘은 육아에 관한 가치관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아마 제임스는 결혼을 안 했거나 했어도 자식은 안 키울 거다. 엘르가 육아에 대한 고충을 늘어놓는 반면 그는 아이의 본능에 대한 예찬을 쏟아낸다. "아이들은 현재에 충실하고 삶을 즐기려 하죠." 멀리서 보면, 즉 자기 자식이 아니면 어떤 짓을 해도 귀여운 아이들에 관해 제임스는 철저히 관객으로서의 입장을 내비친다. 반면 육아는 온전한 현실이기에 이상만 떠들어대는 그가 엘르는 영 아니꼽다. 엄마 입장에서 그녀에게 육아라는 현실은 마냥 예찬할 수만은 없는 고된 노동이다. 여기서 둘은 살짝 엇나간다. 엇나간 상태로 그들은 미술관에 들어간다.
그들은 미술관에 전시돤 작품을 구경하러 온 관객이다. 엘르는 관객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녀와 달리 제임스의 반응은 시원찮다. 엘르는 미술과 관련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제임스와의 관람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따분해하고 그의 이런 태도에 엘르마저 흥미를 잃고 만다. 그들은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관람의 즐거움을 이렇게 떠나보낸다. 미술관에서의 관객은 영화 바깥에서 둘을 지켜보는 '나'밖에 없다. 미술관을 나오는 동안 제임스는 원본과 복제품에 관해 얘기한다. 최근에 그는 이것을 주제로 책까지 냈다. 그 책을 읽고 제임스의 싸인까지 받은 엘르는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녀는 작가로서의 제임스가 아닌 같은 관객이자 말동무로서의 제임스를 원했다. 그의 냉철하지만 그리 세심하지 못한 성격에 엘르는 실망한다. 자신의 말이 따분했음을 알았는지 제임스는 카페에 가자고 한다. 둘은 그렇게 미술관을 나온다. 한 번의 실패, 그리고 새로운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