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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Jul 18. 2022

관객은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더 차일드>.2005

<더 차일드>.2005

브루노는 내가 본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가장 미성숙한 주인공이다. 이제 막 성인인 그와 18살 소냐는 잔디밭을 굴러다니며 때리고 쥐어박기를 좋아한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이해가 되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아기를 뒷자리에 태우고서도 그들의 철없는 장난은 여전하다. 서로 웃으면서 때리고 간지럽히는 등 장난을 친다. 과연 이런 부모 밑에서 아이가 잘 자랄지 걱정된다면 그건 당연하다.

<더 차일드>의 주인공 브루노. 출처 네이버


브루노는 생계를 위해 도둑질을 하는 떠돌이다. 중학생 정도 되는 계산적인 남자아이들과 일을 하고 돈을 나누는 식이다. <더 차일드>에는 거래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유모차를 팔아 돈을 받는 식인데, 그는 하다못해 자기 아이를 팔아버리고 거금을 두둑히 받는다. 충격을 받은 소냐에게 철없는 소리나 하는 브루노. "애는 또 낳으면 돼."


소냐와의 엎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브루노는 다시 아기를 찾아온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기 몸값에 붙은 이자를 떼먹으려는 조폭들의 협박이다. 설상가상 소냐갸 브루노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는 삼중고를 겪는다.


조폭에게 얻어맞은 뒤 돈을 뜯기는 와중에 브루노는 다시 한 번 도둑질을 한다. 늘 따라붙는 남자아이 하나와 핸드백을 훔쳐 멀리 달아난다. 그들의 뒤를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한 차 한 대가 쫓아오면서 추격전이 시작된다. 강물에 입수 하면서까지 그들은 잡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남자아이가 잡히고, 브루노는 도망간다. 경찰서에 간 브루노는 체포된  남자아이를 위해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한 뒤 교도소에 수감된다. 영화는 그의 면회를 온 소냐와 죄수복을 입은 브루노가 머리를 맞대고 흐느끼면서 결말을 맺는다.


1996년 작  <프로메제>에서도 다르덴은 점차 성숙해지는 아이의 모습을 건조하게 담아냈다. <프로메제>와  <더 차일드>, <자전거 탄 소년>의 아이들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한편으론 야만성을 띈다. 혹은 비윤리적인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야만성이 초래한 결과의 공범이 된다. 이때 그들은 숨겨만 왔던 죄책감을 마주해야 하는 어떤 순간을 맞다. 죄의식을 회피하던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 결국에는 한 단계 성숙해진 인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순간이 다르덴의 영화에 담겨있다.


몇몇 분들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분개를 했다. 어떻게 저런 범죄자에 진상인 인간을 불쌍히 여기냐고, 왜 저런 인간을 감싸주냐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더 차일드>의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남자아이를 위해 자수를 하게 된 브루노의 경위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탑재된 가치관에 대한 몇몇 댓글의 인신공격 비슷한 감정 배설을 보고만 있기는 힘들었다(후술하겠지만 이런 반응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그때 잘못이라면 브루노처럼 소매치기를 하고 아이를 팔아넘기는 등 보는 입장에서 용납이 안 될 수준이거나, 한 번 쯤은 넘어가줄 법한 귀여운 실수일 수도 있다. 일부 네티즌들의 분노는 이 영화가 그간 쉽사리 재단해온 용서 가능한 일과 용서 불가능한 일의 경계를 완전히 흐트러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소매치기, 갓난아이를 돈 주고 파는 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용서할 일은 아니다. 그건 형법의 위배는 물론이요 사람들로부터 받을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중범죄를 목격했는데 분노를 안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용서는 다른 문제다. 몇몇 분은 죄수복을 입은 브루노가 눈물의 참회를 하는 장면으로 끝낸 것에 분노한다. 위에서 말했듯 인신매매와 소매치기는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기 힘든 범죄임에 틀림없으니까. 특히 내가 본 것이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아닌 1시간 30분 분량의 짧은 영화라면, 브루노를 향한 분노는 한껏 표출하기 수월해진다. 우린 당연히 타인의 면면을 모두 알 수 없다. 그게 러닝타임이 정해진 영상물 속 인간이라면 더더욱 미지수다. 애당초 영상물로 무언가를 전달하기는 매우 힘들다. 쪽수로 정해지는 책과 달리 영상은 시간과 얽혀 있는 경제성이 중요한 매체다. <더 차일드>라는 1시간 30분짜리 영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브루노의 특징은 결코 다양하지 않다. 때문에 소매치기와 인신매매, '애는 또 낳으면 되지'같은 실언을 하고 끝내는 구형을 선고받은 그에 대한 용서는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불가능성에 도전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그를 연민하지도, 조소하지도 않는다. 용서는 그들의 카메라가 아닌 영화의 관객이었던 우리에게 맡긴다.

다르덴 형제. 출처 네이버

<더 차일드>는 관객에게 그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요구한다. 이는 영상물의 한계와 악용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시간 30분짜리 영상으로 본 게 전부임에도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의 전부를 알 수 있는가. 죄수복을 입고 흘린 그의 눈물이 진정 참회에서 나왔는지 소냐를 향한 기만인지, 우리는 모른다. 브루노를 그냥 방치해두라는 한 네티즌의 댓글이 떠오른다. 이런 반응 역시 고작 1시간 30분짜리 영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관객으로서의 한계가 반영된 댓글이다. 다르덴은 영상물과 관객 간의 거리에서 오는 이해의 결여를 뚫고 나가는 것이 영상물이 만연한 이 시대의 용서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다르덴의 카메라는 부부 곁에 남는다. 그들 곁에 같이 남을 것인지 다르덴은 결정권을 우리에게 쥐어준 뒤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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