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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Aug 13. 2022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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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71개의 단편 영상이 하나의 비극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필자는 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비극 자체가 아닌 비극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라 했을까.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이하 우연의 연대기) 도입부에서 감독은 미리 이야기한다. 이 비극은 은행에서 일어난 실제 총격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비극은 단어 자체에 내포된 '끝에는 결국 슬픔'이란 말로 귀결되기에, 비극 자체에는 재구성을 가능케할 힘이 부족하다(그 비극이 실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창의성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해 감독은 이런 참사를 윤리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총을 구매한 막스. 근데 왜?

1. 어떻게


  결국에는 벌어질 참사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감독인 미카엘 하네케의 손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직조되나. <우연의 연대기>는 북엔드 신(bookend scene. 영화에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면서 전체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구조)을 사용해 실제 독일에서 방영한 뉴스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한다. 미국과 코소보 간의 내전, 프랑스 항공 직원들의 시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루머. 하네케 감독은 영화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뉴스 속보를 중간중간에 끼워넣는다. 사소한 일로 웃고 울고 싸우는 주인공들과 달리 크게 화내고 크게 싸우면서 죽고 죽이는 뉴스 속 인간들. <우연의 연대기>는 씬이 자주 바뀌는데, A 씬의 인물과 B 씬의 인물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B 씬의 인물과 C 씬의 인물 또한 서로를 모른다. 비극의 무대가 되는 은행에서조차 서로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다. 그들은 볼일을 마치면 은행을 떠날 사람들이었다. 루마니아에서 온 불법 체류자 소년을 입양한 여자, 딸을 보러온 할아버지, 돈을 인출하러 온 젊은 남자(이자 범인), 아이가 아프고 아내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은행원. 영화가 막바지로 치닫을 땐 이 인물들이 모조리 뉴스 속 인간들로 치환된다(총기 사태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돼서 말이다).


  <우연의 연대기>의 편집 방식은 독특하다. 한 씬이 끝나면 블랙 아웃이 되고 곧이어 다음 씬이 나타난다. 마치 텔레비전 채널을 계속해서 다른 채널로 돌리는 듯하다. 기존 영화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편집 기법은 영화의 주제의식하고도 관련이 있다. 인물의 행동이 카메라에 담기면 거추장스러운 '원인'은 잘리고 대번에 훑고 넘길 수 있는 상황과 결과만 남는다. 보통 텔레비전 뉴스 속보가 그렇다. 때문에 뉴스가 방영되는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수십가지의 사건 사고를 볼 수 있다(원인까지 보고 싶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봐야 한다). <우연의 연대기>에서도 우리는 여러 인물의 여러 사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어떤 원인은 결여돼 있다. 한 부부가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와, 여자아이가 그들을 유독 경계하는 이유는? 할아버지와 딸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이유는? 사랑한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가 유독 놀라는 이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보는 관객은 그들의 감정과 행동에 공감(못)할 여지가 없다. 그저 흐르는 영상 속 그들의 원인 모를 감정과 행동을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영화를 뉴스처럼 보게 만든다. 집중은 하는데 어떤 상황에도 감정이입이 안 된다. 바꿔 말하면, 사건 사고를 방영하는 텔레비전 뉴스는 시청자로 하여금 인간적 감정을 유발시키지 못한다. 하네케 감독은 대범하게도 감정이입이 필수인 영화에 텔레비전의 매체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하네케가 생각하기에 미디어는 재난의 충격을 막아 내기 위해 애쓴다. (캐서린 휘틀리)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뉴스



  2. 그렇다면 왜?


  이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답을 찾을 수가 없는 질문이다. 애초에 피해자가 들어 마땅한 질문도 아니다. 범인 말고는 은행이란 질서정연한 장소에서 총기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을까. 다시 '왜'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영화 속의 범인인 막스는 왜 총을 꺼내들었을까. 단순히 어떤 남자가 자신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패대기쳤기 때문일까. 이 또한 명확한 답은 아니다. <우연의 연대기> 속 인과관계는 다른 영화들처럼 앞뒤만 보고 간단히 풀어나갈 수가 없는 구조다.   

  원인은 없지만 상황과 결과는 있다. 막스가 총을 구매했고(상황) 그것은 몇달 뒤 총기 난사(결과)로 이어진다. 그는 평소에 자기 말만 하면서 윽박지르는 운동 코치를 죽이려고 총을 구매했나?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선가? 앞서 적은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범인에게서도 감정과 행동의 원인을 잘라낸 단면만을 보여준다. 이 쌀쌀맞은 영화에선 단 한순간의 친절함도 찾아볼 수 없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은행원. 사진1


  영화에 필수적인 요소를 하네케는 모조리 배제한다. 대신에 그는 총기 피해자가 죽어가는 장면을 긴 시간 보여준다. 이 총기 난사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가 다음 씬이라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뉴스 앵커는 이 사건을 짧게 보도한 뒤 곧장 다음 소식을 전한다. 이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뭘까. 필자는 뉴스와 영화의 미세한 차이라고 본다.

  앞서 적은 휘틀리의 말처럼, 미디어는 재난의 충격을 걷어낸 다음 건조하게 상황만 전달하는 매체다. 영화에서 다루는 총기 난사도 흘러가면 그만인 뉴스 중 하나가 된다. 이 같은 텔레비전의 매체적 특성을 차용한 감독은 그 특성에서 잠깐 벗어나, 오직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쇼트(사진1)를 만든다. 재난이 몰고 온 거대한 충격. 뉴스에선 배제돼야 마땅한 이 충격의 쇼트를 영화 속에선 가감없이 보여줄 수 있다. 그 다음 씬인 또 다른 뉴스 속보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몰입에 방해만 되던 뉴스는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진정 무엇에 몰입하지 않는지,  그리고 몰입을 진정 방해하게 하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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