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언저리 Jul 31. 2022

영화가, 혹은 현실이 보내온 연극 초대장 (2)

<사랑을 카피하다>.2010 (2)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창문을 보라, 창문을 보라


이야기를 시작하는 제임스(사진4)

그들은 커피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는다. 다시 한 번 제임스와 대화를 시도해보는 엘르. 그녀는 그가 낸 신간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다. 제임스는 조각상을 보던 엄마와 아들에 관해 얘기하는데, 그 이야기에 감응한 엘르가 눈물을 흘린다. 당황한 제임스는 그녀의 눈물이 자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유연하게 풀어가던 이야기를 느닷없이 바꿔버린다. 카페에 오기 전까지 서로 주구장창 해오던 원본과 복제품이란 주제를 이야기에 집어넣는다. 상대를 감동시킬 만큼 자연스러웠던 이야기는 망가지고, 엘르는 또 다시 실망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둘의 관계성에 단발적으로 이루어진 어떤 변화다. 이 대화 속에서 말하는 이는 제임스, 듣는 이는 엘르다. 카메라는 이야기를 하는 제임스와 듣는 엘르의 구도를 어떻게 잡았나. 정면 미디엄 쇼트(사진4)다. 여타 영화의 대화 씬이라면 오버 숄더로 인물을 잡고 숏과 리버스 숏을 반복했을 테다. 키아로스타미는 왜 정면 쇼트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필자가 엘르의 눈물을 보고 놀란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영화 바깥에서 구경하던 '나'는 오직 '나'만이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감응해 눈물을 흘린 엘르의 정면 쇼트를 보면, 그녀는 하나의 작품을 보고 감정이 올라온 관객처럼 진중하다. 관객인 '나'는 영화 속배우 역시도 한 명의 관객이 되는 짧지만 강렬한 순간을 마주한다. 관객과 관객의 대면, 그리고 응시. 영화를 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순간이 여기 있다. 이 장면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임스처럼 당황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엘르

제임스와 엘르의 짧았던 교감이 끝나고, 제임스는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 이야기를 오래 이어가지 못한 그에게 다시 한 번 그녀는 실망한다. 아쉽지만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건가? 그때 체념한 엘르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이 카페의 여주인이다. 그녀는 아까부터 둘의 대화를 죽 엿들었다. "좋은 남편 같아요." 제임스와 엘르의 대화를 죽 지켜

카페 여주인(사진5)

본 그녀의 소감이다. 그녀는 제임스와 엘르가 부부 사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때 '나'는 '나'와 엘르 말고도 관객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르는 그녀의 오해를 지적하지 않고 그 오해를 발판 삼아 연기를 시작한다. 제임스를 남편으로 상정한 뒤 엘르는 관객(이 되어버린 여주인)과 대화를 이어간다. 이때 엘르를 잡은 정면 쇼트는 바뀌지 않지만, 주인의 시선(사진5 처럼)에 따라 엘르 역시 프레임 바깥으로 시선을 둔다. 

  궁금한 점 하나. 왜 엘르는 오해로 빚어진 상황을 해명하기는커녕, 스스로 배우가 되는 모험을 걸었나.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대신에 쇼트가 한 번 바뀐다(사진6). 그 다음 쇼트에선 여주인이 손님한테 와인을 따라주러 간다. 그녀를 향한 카메라는 엘르의 시점이다. 이때 다시 한 번 엘르는 도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주인 앞에서 제임스의 아내 역을 맡아 열연을 선보인다. 처음부터 엘르를 제임스의 아내로 본 그녀는 엘르의 푸념을 들어주고, 부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언도 해준다. 그녀의 조언이 부부로 가장한 엘르에게 먹혀들지 않는들 무슨 상관인가. 진심 어린 조언도 해주는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엘르는 연기만 하면 된다. 이 연기를 그녀 역시 좋아하기에 대화는 그들 서로에게 윈-윈이다. 

남편(이 돼버린 제임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 엘르(사진6)


  흥미진진한 대화에 빠져들 즈음 여주인은 창밖에서 전화를 받는 제임스를 향해 말한다. "수염만 깎았으면 완벽할 텐데요." 그녀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제임스에게 닿지 않는다. 자신이 온전히 제임스로만 있는 줄 아는 창밖의 그와, (제임스와 엘르라는) 부부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가게 안에서, 여주인의 한 마디는 두 공간에 나뉘어 있던 경계를 선명히 보여준다. 또한 이 장면은 사진1에서 29번 손님을 찾던 직원의 공허한 외침을 상기시킨다. 직원의 외침은 여주인과 달리 왜 공허했나. 카페에서의 제임스처럼 그녀 또한 사적인 일(흡연)로 창밖에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엘르와 아들은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고, 엘르와 제임스는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엘르와 아들은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도 전에 엘르가 먼저 자리를 뜬다. 따라서 그들을 부를 사람은 직원 밖에 남지 않는다(물론 직원은 자기 일 하느라 바빠 그들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다). 반면 제임스와 엘르의 대화는, (부부 사이에 나눌 법한 대화가 아닌데도) 둘의 관계를 오해하게끔 만든 그들의 진중함은 한 명의 관객을 낳았다. 그 관객은 카페에서의 두 사람이 부부임을 알기에(혹은 믿기에), 자기 일에 열중한 창밖의 남자를 응시한다. 그 덕에 제임스는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창문에 갇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엘르와 달리). 



4. 변해가는 제임스


  때문에 카페에 나와서도 그녀의 연기는 끝나지 않는다. 아들과 전화를 하던 엘르가 느닷없이 제임스를 보며 핀잔을 놓는다. 엘르의 그것은 작가 제임스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남편 제임스에게 하는 말이다. 안에서 끝날 줄 알았던 역할놀이를 그녀는 밖으로 끌고 온다. 제임스는 조금 받아주다가도 영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사진을 찍자고 재촉하는 엘르


  그들은 어떤 조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엔 신혼부부를 위해 결혼사진을 찍어주는 코스가 있다. 이 코스에 먼저 엘르가 들어간다. 그 앞에서 망설이던 제임스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엘르는 그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 신혼부부에게 자신과 제임스가 15년을 부부로 살았다고 소개한 것이다. 신혼부부 쪽 신랑이 그들과 함께 촬영을 권유한다. 몇 번 거절하던 그는 신부의 손에 이끌려 사진을 찍는다. 카페에서 제임스의 아내로 오해받던 엘르는 이제 신혼부부 앞에서 15년 차 부부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제 부부의 탈을 쓰고 걸어다니며 타인에게 말을 건다. 신혼부부는 이 위장 부부가 처음으로 말을 건 상대다. 그들은 그렇게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온다. 


  제임스는 다시 작가로서의 본인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해탈한 듯한 엘르는 제임스의 어떤 말에도 시큰둥하다. 관계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 둘은 작은 광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조각된 동상을 본다(동상의 전체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으로서 작품을 본 스스로의 감상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 충돌하고, 서로의 감상을 딱히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작품에 감동받기는커녕 서로 말싸움하느라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관객이 되지도, 관객을 연기하지도 못한다. 

  특히 제임스는 예술 관련 저서를 집필하는 작가임에도 동상을 보고 제대로 된 감상을 밝히지 못한다. 반면에 엘르는 동상을 보고 느꼈던 점을 말한다. 이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뭘까.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그는 상처를 입었을까. 혹은 잠시나마 작가, 또는 관객으로서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싫어하잖아요"라는 대사에서 그 뜻이 얼핏 후자쪽에 있음을 유추해낼 수 있다. 영화 내내 생기있던 그의 얼굴은 지금 상당히 지쳐보인다. 엘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관람객과 얘기를 나눈다. 


사진7



  그때 제임스의 시점(사진7)으로 쇼트가 바뀐다. 부부싸움을 하는지 남편의 목소리는 제삼자가 듣기에도 위압적이다. 근데 남편이 몸을 움직이면 그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다.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면 누구나 오해할 법한 장면이다. 근데 이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카페에서 제임스와 엘르를 보던 여주인. 보는 사람의 오해 때문에 그 상황이 곡해되던 카페 시퀀스와 비슷하다. 이때 카메라는 제임스의 시점으로 부부가 움직이는 모습을 쫓아간다. 이 카메라 렌즈는 제임스의 눈이자 곧 '나'의 눈이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한다. 그는 여기서 쇼트를 바꾸지 않는다. 대신 프레임 바깥에 있던 제임스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때 카메라는 사진7의 시점, 즉 제임스의 시점(이었던 것)으로 죽 이어간다. 원래 제임스와 관객인 '나'의 눈이었던 카메라는 이제 '나'의 눈으로만 남게 된다. '나'와 함께 있던 제임스는 스스로 관객석을 박차고 일어나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관객석에 편하게 앉아만 있던 그도 허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앉아만 있기도 이젠 지치고 피로하다. 그는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배우가 된다. 

  관객(카페 여주인)의 왜곡으로 탄생한 배우(엘르)가 아니다. 제임스는 스스로 영화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배우를 자처하고 나선다. 이후에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는, 사진7의 남자로부터 조언을 듣는다. 아내 어깨에 손을 얹으라는 조언을 (남편이 된) 제임스는 그대로 실천한다. 아무 말 없이, 식당에 들어가면서 그는 엘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영화 속 현실의 배우가 아닌, 현실이라는 영화 속 두 배우(가 된 사람들)의 교감은 여기서 싹튼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08화 영화가, 혹은 현실이 보내온 연극 초대장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