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묵혀둔 이야기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서울은 회색빛과도 같았다. 지방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느껴봤을 만한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한 그런 느낌말이다. 이런 서울에 ‘나’라는 사람이 상경 후 정착하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그런 느낌을 꽤 최근까지 느꼈으니까.
A를 만난 후 서울 살이의 안정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잔잔하지 못한 내가 고요한 호수처럼 미동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매사에 모든 일에 꼼꼼하게 여유 없이 스스로를 옥죄이는 나였지만 나와 다르게 A는 다그치지 않고 ‘그러지 않아도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넌지시 던졌다.
A는 늘 내게 긍정적인 언행으로 모난 나의 생각들을 보듬어주었고 그 말의 힘을 통해 지금의 잔잔한 내가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들이 과연 나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톱니바퀴가 딱 맞아 돌아가는 것이 아닌 모끼리의 동력을 통해 도는 것처럼 일단 맞물렸으니 도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시간이 틈새로 녹아들어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견고해졌다.
나조차 스스로 하지 못했던 걸 바꿔준 사람, 그리고 그만의 세계에서 날 보듬고 가꿔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천리의 세계라 생각했는데 그 천리를 가는 동안 나는 비로소 잔잔히 멎는 물결이 되었다.
A와의 대화 끝에는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창문을 닫으면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문 뒤로 물러나, 오로지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아 있는 듯한. 세상이 사랑의 대상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다는 그런 생각. 오늘도 천리의 세계에서 사랑의 대상을 하나씩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