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편 다크 나이트의 세련된 영상미와 긴장감 있는 연출을 이 마지막 시리즈에서 기대했(한)다면 아마도 매우 실망할 것이다.
2. 일반적으로 비긴즈보다 다크 나이트가 훨씬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브루스 웨인의 태생적인 두려움 (그가 우물에 추락했을 때부터)에 대한 기나긴 서술과 그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고 또 다시 가면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얻게 되는 과정을 감상하는 것보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인 절대 악 조커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완성된(것 같아 보이는) 배트맨과의 결투가 사람들에게 주는 짜릿함이 더 즐겁기 때문이다. 여기에 배트맨의 고뇌는 덤이다. 다시 말하자면 2편 다크 나이트는 가장 영화적인 연출과 캐릭터로 채워진 가장 영화다운 영화인 셈이다.
3. 놀란 감독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악당보다 브루스 웨인이라는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리즈는 캐릭터들 간의 교감도 다소 떨어지고, 긴박감 넘치는 연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더 스케일이 커진 악당들이 활개를 치고 배트맨은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까지 겪지만 사실상 이 마지막 시리즈에서 브루스 웨인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다크 나이트가 브루스 웨인이 브루스 웨인과 절대적인 무법자로서 존재하는 배트맨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조커와 하비 덴트, 레이첼을 통해 보여줬다면 ( 이 때문에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하는 배트맨 그 자체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직접적으로 브루스 웨인이 그 자신을 통해 다시 그 혼란과 고통을 직면하게 한다. 늙고 병들어가는 브루스 웨인을 보여주면서 개인의 삶에서도, 영웅의 삶에서도 모두 실패한, 사실 매우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그가 겪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통해 그려낸다.
4. 때문에 더 핏이라는 원형감옥에서 그가 밧줄 없이 탈출하는 장면은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다. 물론 이 장면은 다크 나이트 같이 주요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주제를 암시했던 세련된 방식이 아니다. 매우 직접적이며, 고립된 공간에서 눈 앞에 직면한 문제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넘어선다는 설정은 자칫하다가는 그가 겪는 고통과 고담시라는 공간에서의 혼란과 붕괴가 긴밀하게 맞물리지 못하고 분리가 돼버리는 전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 주인공이 튕겨나가면서 영화가 굉장히 엉성해 보이고 러닝타임에 비해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사실상 더 핏이라는 원형감옥에서 브루스 웨인이 추락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이러한 기능을 하는데도 이 공간의 등장을 내가 의미 깊게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적인 완성도를 떠나 어쩌면 총 세편의 영화를 마무리하며 이 영화들을 모두 아우르는 결말이 응축된 장면이 결국 이것이 아닌가 해서이다. 배트맨의 슈트와 가면이 아닌,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브루스 웨인이 오롯이 인간의 육체와 사고로 더 핏을 탈출했다는 것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배트맨의 라이즈가 아니라 브루스 웨인 한 개인으로서의 라이즈를 의미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원형감옥에서 탈출한 배트맨은 육체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평범한 인간일 뿐이며 폭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배트맨의 성장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이 다시 자기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장치로 쓰인 셈이다. 이 장면은 다소 김 빠지고 작위적인 결말을 상쇄시키는 역할 또한 한다.
스파이더 맨이나 슈퍼맨 같은 히어로가 점점 강해지는 반면, 배트맨의 육체는 늙고, 정신은 붕괴된다. 그래서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는 브루스 웨인의 존재를 지우고 배트맨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로 시작하여, 그 경계에서의 브루스 웨인의 고뇌를 다크 나이트를 통해 그려냈고, 마지막 3편을 통해 배트맨의 존재를 지우고, 브루스 웨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애초부터 놀란은 배트맨이 된 브루스 웨인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이 되기 위한 배트맨을 만들고자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배트맨은 영원불멸의 히어로가 될 수 없으므로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쓴 채, 상징으로서의 죽음으로 배트맨을 완성시켰고, 이제는 고담시의 어둠에 의해 가려졌던 자신의 삶을 찾고자 떠났다.
5. 이런 이유로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 시리즈에서 벗어나도 독립적인 영화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반면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 전의 두 편을 모두 아울러야 영화적으로 완성된다. 배트맨 트릴로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시리즈 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캐릭터와 비슷한 내러티브의 연장선이 시리즈물의 필수조건이 아님을 놀란은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유념했고, 적어도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던 듯하다.
6.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를 독립적으로 평가하자면 흥미롭지 않다. 중간중간 편집이 튀는 부분도 꽤 보이고, 각각의 캐릭터를 설명해줄 만한 단서들도 부족하고(존 블레이크가 배트맨의 정체를 알게 되는 계기가 가장 허무했다. 아마 이 장면이 영화 초반에 나왔던 것 같은데 나는 이때부터 이 영화에 큰 기대는 버렸던 것 같다. 러닝타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존 블레이크의 회상 장면을 편집한 걸까 생각은 했지만 그걸 떠나서 이 영화에서 가장 멋없는 캐릭터가 존 블레이크였다. 그건 베인이나 탈리아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렇게 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정말 해야 할 말들이 너무 많으므로...)
캐릭터들 간의 교감도 밍밍하니 싱겁다(영화 인셉션에서 내가 받은 둔탁하고 나무토막 같은 느낌과 비슷하다. 물론 인셉션보다는 덜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무토막 같은 캐릭터들은 놀란감독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인 것 같다. 인썸니아는 제외)
무엇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작위적인 결말이 가장 실망스럽다. 다크 나이트의 결말의 여운을 왜 브루스 웨인의 해피엔딩 결말로는 끌어올 수 없었는지 궁금하다.
7. 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아쉽고, 섭섭하다. 시리즈 영화라면 그 여운은 더 오래 남는다. 이 여운을 오래 지속시켜도 되는지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 건지... 종은 영화 중에서도 여운을 오래 지속시켰다간 내가 힘든 경우가 있고, 별 볼일 없는 영화도 특정한 여운이 계속 남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가 여운을 오래 지속시켜도 되는 영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브루스 웨인이라는 한 개인의 삶에 집중해서 보자면 이 영화는 많은 허점에도 불구하고 분명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