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지 말고 살기
"로빈아 왜 이렇게 작아졌어?"
오랜만에 본 H는 나를 보며 놀란다. 올 초 부쩍 살이 빠졌다. 마지막으로 H를 봤을 때보단 근 10kg이 넘게 빠졌으니 놀랄 만도 하다. '빠졌다', '말랐다'가 아닌, '작아졌다'는 예상치 못한 표현에 웃음이 났다. H답다. 여전히.
지난겨울부터 조금씩 먹는 양이 줄었는데, 이렇게까지 '작아질' 줄은 나도 몰랐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끼니를 거르다 보니 혀가 거칠어 종일 물을 마셨다. 좋아하던 찜닭을 먹어도, 입맛이 돈다던 신 음식을 먹어도 그저 그랬다. 처음 알았다. 나도 이렇게 오래 입맛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입맛 살리기 운동은 뒷전으로 한 채, 며칠 전 처음으로 여러 반찬을 시켜봤다. 간편함의 끝이라는 배달음식과 레토르트 식품도 메뉴 선택이라는 '귀찮은' 과정이 따라붙는다. 메인 없이 가짓수로 승부하자. 오랜만에 먹는 나물과 어묵, 고기볶음 같은 것들. 혼자 살고 나서야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별 것 아닌 것이라 생각했는데 밥 한 그릇을 금방 비웠다. 내가 먹고 싶던 것은 반찬이었군. 몇 달간 풀지 못한 문제가 생각보다 허무하게 풀렸다.
얼마 전 생일을 맞은 동료 C에게는 쭈뼛대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어색할 각오를 했는데 C는 반갑게 맞으며 긴긴 근황을 전한다. 아직도 아아가 최애 음식이냐며 반기는 마음이 귀하고 고맙다. (사실 내 최애 음식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저도 박소은 노래 좋아해요. 그래서 SNS에 그 노래 올리셨을 때 반가웠어요."
반가운 마음에 TMI를 늘어놨다며 조금의 머쓱함을 덧붙이는데 나 역시 반갑게 답장을 하다 보니 TMI가 줄을 잇는다.(박소은을 좋아한다니요... 반가움이 안 들 수 있겠습니까...) 책, 꿈, 마음, 음악... 전체 보기로 넘어가는 카톡이 몇 번이나 오가는 동안 C가 추천한 음악들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드럼 소리에 맞춰 걸음을 내디디니 성가신 비도 나름 운치라고 포장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종일 한 사람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기타뿐 아니라 드럼 소리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는 일도.
스물아홉에서야 취향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습관처럼 움직이고, 살아내고, 삭막해져서 보지 못한 미세함. 고양이의 말랑하고 묵직한 몸,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하는 산책, TMI와 문화가 가득한 근황, 너무 무겁지 않은 액세서리. 발견하는 게 늘어날수록 일상 속 소소한 기쁨도 많아진다.
취향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도 하고 있다.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나 감흥 없는 영화, 별로라며 박아뒀다가 울면서 읽는 책, 막느라 애를 썼지만 사실은 기다렸던 사람들, 대화, 마음 같은 것들. 오류를 바로잡으면 더 정확하게 즐거워질 수 있다.
내일은 어묵볶음과 미역줄기볶음을 꺼내 밥을 먹을 것이다. 자기 전에는 침대에서 편지를 끄적이고, 한로로를 들어야지. 아... 그저 흐르는 대로 살고자 했으나 또 계획을 짜고 있는 중생이여. 나는 자꾸만 습관처럼 '살아내게' 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각하며, 이 순간을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