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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호연
Nov 05. 2024
죽고 싶은 내가 떠올려야 할 것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세상을 순례하던 우울의 크기가 커졌을 무렵,
한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하고 소중한 시간들이 순간 스쳐 지나간 적이 많았기에,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인간의 우울증은 판단력을 저하시킨다는 것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술과 약을 먹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가장 마지막 기억은,
거센 파도가 모여 잔잔한 바다가 되었기에
바다가 잔잔해졌을 무렵 바다에 제 발로 뛰어들었던 것
하지만, 갑자기 파도가 몰아쳐서 나를 모래사장으로 밀어버린 것.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파도가, 그리고 바다가 일러주는 듯했다.
하늘이 부르지 않는 이상 세상을 등질 수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내가 또다시 죽으려고 한들, 하늘에서 부르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바다를 찾는다면,
그때가 되면 내가 떠올려야 하는 것들
나는,
비가 억세게 내리는 날에 온몸으로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에 내리치는 천둥번개를 좋아한다.
한여름의 바다보다 겨울바다를 좋아한다.
겨울이 되어 성탄절을 기념할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일을 기다리는 나를 좋아한다.
한겨울에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선샤인】,
리차드 커티스의 【러브액츄얼리】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잠이 들지 않는 새벽에 클래식과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어쿠스틱카페의 tears(눈물)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김윤아의 【Going home】 를 들으며 "우는 날도 있는 거지." 하며 펑펑 눈물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당이 떨어져 어지럽고 기운이 없는 날에
카페에서 차가운 바닐라라떼와 녹차라떼, 그리고 밀크티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크림이 들어간 디저트를 먹을 때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먹는 것을 좋아하고,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콜드브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나를 좋아한다.
평생 '외로움'이란 모르고 살 줄 알았던 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온 이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한들,
그 시기에 소중한 인연들과 연락을 하며 외로운 도시를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고향에서 지냈을 시기에, 사람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을 좋아했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몇 시간 거리인 광화문까지 가서
교보문고 본점에 들어가 교보문고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을 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광화문거리에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직장 사람들과 웃으며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_큰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던 그날의 나를 좋아한다.
열댓 명 되는 무리가 나를 중간에 세우고 둘러싸여서는 나를 몰아가던 시기에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강인했던 나를 좋아한다.
어쩌면 그 시기의 내가 지금보다 더 강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과거의 나를 존경한다. 그때마다 그날의 나를 존경하는 모습 또한 좋아한다.
엄마와 손잡고 시장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돈이 없어 쇼핑할 수 없어도,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손잡고 시장을 구경하며 엄마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와 낚시를 하러 갔던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아빠가 잡은 물고기를 맨손으로 만지며 손에 비늘이 묻었다며 칭얼거리던 그날의 나를 좋아하고,
새벽에 낚시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날의 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여유롭지 않은 시기에 낚시를 하는 아빠를 좋아한다.
그날 빛났던 그의 용기를 존경한다.
옷이나 화장품으로 사치 부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돈을 열심히 모아, 몸에 그림을 새기는 것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돈을 모아 이곳에는 이 그림을 새겨야지,
이 흉터는 이 그림으로 가려야지.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는 나를 좋아한다.
자살을 떠올리지 않고도 우울을 견뎌냈던 과거의 나를 좋아한다.
9층 옥상에 올라가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던 학생 때 나를 좋아한다.
아무리 힘들고 심장이 뛸 만큼 괴롭힘을 당했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던
용맹하고 나 자체로 강했던 그 시기의 나를 좋아한다.
_과거로 돌아가 나에게 묻고 싶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겨낼 수 있었느냐고.
그럴 때면 과거의 내가 대답한다. 이겨내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힘든
것들은
알아서 흘러지나 갔다고.
시간이 독이 아닌 약으로 작용될 때, 그 순간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좋아한다.
이번에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이겨냈구나. 생각하며 나 자신을 달랠 줄 아는 나를 좋아한다.
더 늦기 전에 엄마와 아빠의 짐을 함께 받들고 해결할 건 해결하고,
우리의 삶에도 여유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가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상상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떠올려야 한다.
또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판단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들, 꼭 읽고 기억해내야 할 것들.
나를 살게 하는 것들, 내가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것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정상 위에 서있는 나 자신
그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상상해 보자.
음, 꽤나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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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호연의 일생、 작가 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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