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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 Nov 14. 2024

7月

Commissioned by Studio-7(Seven)


빗방울이 꽃의 고개를 숙이게 만든 날에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내 낡은 기억을 꺼내서
내 앞에 내려놓았다.

7월에 반가운 비가 내렸다.
날이 선 감정도 축축하게 적셔

뭉툭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하늘을 더러 말했다.

어째서 좋지 않은 기억들은 그리도 잘 떠오르면서, 따듯한 추억들은 노력해야 떠오르느냐 물었다.

이제 와서 추억들을 하나하나 읊어보자니,

내 모습 참 초라하고 쓸쓸해보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과거를 추억해도 된다고


그리고, 실컷 울어도 된다고 하늘이 허락한 날.

내 눈물 젖은 기억은
손에 닿지 않게 깊은 곳에다 묻고,
그 위에 잡다한 모든 것들을 쌓아 올려두었다.

내가 다시는 마주할 수 없도록.
마주치더라도, 낯설다 느낄 수 있게.

눈물 젖은 기억이더라도 반가워서
몸이 설레어 가까이 다가갔다.

집앞에 개울가 근처에 나갔다.
그때, 흰양귀비를 보았다.


/
잠의 신 피에프노스가 여신 헤라의 명령으로

신 일리스에게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정적의 세계만이 감돌고
새도 벌레도 짐승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의 세계의 눈에서

바람에 스치는 풀소리와
저승의 강물소리만 들었다 하였다.

그의 궁전 주변에는
수많은 양귀비가 피어있었고,
지상에 어둠이 드리우자,

피에프노스는 그 꽃을 꺾어서
꽃잎을 지상에 흩뿌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잠재웠다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곧장
꽃을 꺾어다준 당신이 생각났다.

길을 걷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며
야생화를 꺾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고,
금방 꽃을 꺾어다주었다.

꽃은 금방 꺾여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만큼 나를 사랑했다 하였다.

서툴게 꽃 한 송이로 시작해
다발을 선물해 줬던 당신이 생각났다.

처음엔 이유가 없었고,

그로부터 다음, 다다음엔

떤 것이 되었든 이유가 존재했다.

사랑하기에 우매했던 시간들 속에
당신이 꺾어다준 야생화는

7월의 계절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온몸으로 맞은 빗물이 흐르고
시간이 흘러 의미가 쇠퇴된 지금에도

피에프노스가 잠재운 내 감정은
결코 재워지지 않고, 사랑을 드리우게 했다.

—당신이 꺾어다준 양귀비가 너무 아름다워서,
꽃잎 하나하나 떼서
햇볕아래에 놓고 말렸다.

말린 꽃은 금방 검붉게 변해버렸고,
바닥에 후두두 떨어져 흘러내렸다.

그리운 마음에 곧장 바닥에 내 팔을,
내 다리를, 내 머리를 부볐다.

꽃잎이 다닥다닥 붙었다.

꽃이 지고 소멸하면서 흘린 눈물을 모았더니
넓은 바다가 됐다.

쨍한 햇살은 잠에 들고,
달님이 떠오를 시간에
바다 앞에 서있는 나는

내 몸에 붙은 꽃잎이
내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길래,

그렇게 며칠 몇 달의 시간을 보내며
그대로 놓아두었다.

내 위에 앉아있던 꽃들이 썩어갈 무렵,
나는 내 몸 씻으려 다시 바다를 찾았다.

어째서인지 바다에 들어가면
이 검붉은 것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사랑하기엔 우매했던 긴 시간을 끝으로
낙화했다.

붙은 꽃잎이 떨어져버렸어도
내 눈물이 고인 바다가 일러주었다.

"꽃잎은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있어.
아직 여전하고, 영원할 테고,
추억하고 싶을 때면 이리오렴.

낙화한 꽃잎이,
네 몸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꽃잎이
너를 반겨줄 테니.

그때가 되면 우리는
추억에 드리운 이곳에서
영원히 따듯할 수 있을 거야."

잊고 있었던
'진심'이라는 어려운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어 눈앞에 내려놓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바다는 더 넓고 깊어져만 갔다.

한낱 허울 좋은 신기루와 같은 내 고백을 바다의 앞에서 털어놓았다.

—상처보다는 치유를,
불운 말고 행운을,
불행 말고 행복을.

그렇게 빌었다.
—당신을 떠올리면서.

내가 이토록 미련하고 청승맞게,
한심하게 구는 이유는

너에 대한 기억이 무척 반가웠다.

아마 지금의 시련과 비교하기에
자그마치 떠오른 순수함이
보다 애처로울 만큼 반가워서.

"우리 사이에

얕게 낀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고

두 잊어버리자."

순수함만 남겨놓고 그리워하며
그렇게 나는 용서를 하고,

우리는 앞으로
이를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재워지지 않고 따듯했던
7월이었다.



Commissioned by Studio-7(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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