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영혼을 판 적이 없는데도

by 호연

악마가 나타났다.


내가 손에 쥔 칼은 내 목을 짙게 그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약들은

모조리 내 입에 털어 넣어진 채

술과 함께 뱃속으로 들어갔다.


약물과다복용에,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나의 아픈 과거를 흉내 낸

악마가 나타났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그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반가웠다.


"삼촌, 엄청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

"호연아, 정말 미안한데…

난 이제 세상에 없을 거야.


주변에는 피가 범벅이고,

약은 얼마나 먹은 건지 모르겠어.


잘 살아. 미안해 먼저 떠나서…"

.

"삼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삼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어봐요.

숨 좀 돌리고 다시 얘기해 봐요.

삼촌, 삼촌???

괜찮은 거 맞아요?"

.

나는 곧장 경찰에 신고를 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내 과거와 너무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죽으려고 했던 어느 40대에게

내 아픈 과거가 떠오름은 잠시,

그의 생명의 불씨가 꺼질 것 같단 생각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손을 떨며

경찰과 구급대원에게 자초지종 상황설명을 하고,

제발 그를 살려달라 이야기했다.


과정은 뒤로 해두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그는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자살행동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내가 했던 방식대로 자살시도를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

그가 미웠다

미웠고, 악마 같았다.

내 아픈 기억을 일부로 상기시킨 것 같다는 생각.


그저 관심을 받기 위해 나를 괴롭혔다는 만용.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악마.


한참 지나서 불안장애가 심해졌을 당시,

집집마다 붙어있는 창문에

누군가 서있는 것 같았고

서있는 누군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또다시

창문 몇 개를 볼 때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까 봐

창문 쪽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수없이 많은 악마들이

나를 카메라로 찍어대고,

삿대질하며 수군거리고,

결국 내게 무어라 했을 때


그때 생긴 트라우마였을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내 수많은, 순서를 정할 수도 없는

0번째 악마다.


악마들의 소동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울 때도

저 밑에 있는 딱딱한 바닥이 있음에도 불과,


"저기 저 바닥, 푹신해 보이지 않아?"

라고 내 귀에 대고 지껄이는 악마.


그들의 숨이 끊어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내게 무어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보고 듣고 싶다.


이제 그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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