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잊혀지는 기억이 있다.
내게는,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한다.
내게는,
기억해내고 싶어도 기억할 수 없고,
떠올릴 수 있다 해도 떠올리기 싫은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
누군가,
일부로 필름 한 면을 잘라놓은 것처럼
그 해에 대한 기억만 없다.
가족과 보낸 추억도,
열심히 보낸 나날도,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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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10살 때였다.
매 순간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려 했던
식구들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지금 그때를 회상하며 즐겁게 대화 나누는 가족에
비록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됐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잊고 싶었을 순간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이따금씩 운명을 믿곤 한다.
안 좋은 기억 전부 털어버리고
나아갈 세월이 한참 남아있다고.
날 돕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몰래 잘라놓은 건 아닐까.
그 기억을 어딘가에 버렸든, 훔쳤든,
어찌 되었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꼭 좀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말이다.
그 해 날 담임했던 선생님의 성함과,
그날에 대한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다.
사물함에 있던 양치컵에 누군가 뱉은 침이
때는 겨울이라,
남아있던 물이 얼어붙은 줄만 알았고
누군가 나에게 발길질을 하고 밀쳤을 때는
한 순간의 실수 또는,
하나의 ‘놀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씩씩할 수 있었나?
지금 와서 그때를 떠올리면,
차라리 그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천하태평했던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거대해 보이고 강해 보여서,
이제 만나게 된 시련들을 전부 이겨버렸을 것 같다.
10살의 윤에게 물어보고 싶다.
윤아,
어떻게 그리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있었어?
그렇게 질문하면 금방 윤은 대답한다.
“그땐 싸우고 있는 줄 몰랐어!”
“거짓말.“
윤의 대답은 순엉터리에, 거짓말이다.
학교를 마치고, 전교생이 하교할 시간에
교실에서 전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변 눈치를 살피고 책가방을 챙겼던 너였잖아.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빙빙 돌며,
널 기다리는 부모님을 창문 너머로 지켜 바라보다
해맑게 웃으며
엄마 손에 있던 천 원짜리 떡볶이를,
아빠 손에 있던 천 원짜리 슬러시를,
맛있다 먹으면서 응석 부렸던 너잖아.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라며
ー 나무랐던 아버지가 무서워서
버스 멀미 때문에 도무지 학교를 못 다니겠다고
몇 년간을 조르고 조르다가
가까스로 전학 가는 데에 성공했던 너였잖아.
엄마를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고생하는 아빠를 더 고생시킨다고 혼났지만
그래도 학교 가는 길이 조금은 더 쉬워져서,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좋았던 너였잖아.
평생 말썽꾸러기로 불리어도 괜찮아.
사춘기에, 방황하는 모습처럼 보여도 괜찮아. 처음 만나보는 친구들이 너무 반갑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아.
그 해의 추억이 기억나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 해의 원동력이, 부모님이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그 해의 언니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고,
우리가 놀러 갔던 관광지 전부 지워져 버렸지만,
모두 그 해의 나를 궁금해하지 않아줘서
이 이상으로 물어보지 않아줘서 고마워.
덕분에 윤이가
그 해의 여름을,
그 해의 겨울을,
끝내 잊을 수 있었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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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워버리면 된다고,
아픈 기억 속에 사는 내게
10살의 윤이, 말에 운을 뗐다.
“그 해의 너를 떠올려봐.
넌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야.“
스물둘의 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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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린다면,
더한 것들도 기억해 낼 수 있겠지만
10살의 윤은
이 이상으로 기억하지 않기로,
자신과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넌 변함없이 강한 너일 테니까.
지금의 역경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