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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은 Aug 11. 2021

4. 사실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나


참 다행히도, 나의 부모님은 나를 독립적인 한 인격체로 대하며 키워 주셨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취향이 오롯이 담긴 동화책을 고를 수 있었고, 웃어른이 주신 내 용돈이 엄마의 신상 가방으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경제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내 삶이 부모님께 종속되어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에 나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나 때문이라도 진작 이혼하실 거 몇 년 미루긴 하셨겠지만, 그 과정과 결정에 나의 의견을 묻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것이 조금 억울했다. 8년간 몸 담고 있었던 가족의 틀이 흩어지게 되는데, 나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곧 나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간절한 부탁에도 결국 헤어짐을 택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재혼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아저씨랑 같이 살아도 될까?” 혹은, “아빠가 아줌마랑 같이 살아도 될까?”와 같은 질문은 받지 못했다.

그냥 어느 순간 엄마 옆엔 아저씨가 있었고, 아빠 집엔 아줌마가 있었다. 나는 그저 소개를 받는 형태였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혼란스러웠다. 나는 자연스럽지 않은데, 나는 어지러운데, 이미 모든 것은 결정이 나 있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이모의 집에서 엄마의 임신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한참을 슬퍼했다.


2010. 11. 05. 금

엄마가 임신을 했다.
저번 주 주말에 들었다. 그때가 4주였다.
덤덤한 척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아저씨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지.

왠지 너무 힘들어서, 하굣길에 엄마랑 통화하고 집에 들어와서 울었다.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왠지 나 혼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외로웠고, 기대했던 일들과 모든 여행이 취소되어서,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이모 말론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 애가 하나쯤 있어야 한댄다.
이혼 방지를 위해서일까? 그런 이유라면, 엄마가 원망스러울 것 같다.
나 낳아놓구 이혼했으면서.
내 삶이 너무 싫다.

평범한 가정에서 엄마 집, 아빠 집 따로가 아닌 ‘우리 집’에서 살고 싶다.
아빠 다른 남매 또는 자매는 드라마에서만 나올 줄 알았다.
재미있는 축제, 즐거운 평창여행, 보람 있는 중국 여행 따위 이제 없다.
평창 여행은 정말 가고 싶었는데. 엄마와 둘이서만 간다기에 정말 기대했는데.
왜 하필 지금일까.
왜 하필 나일까.
이젠 엄마 앞에서 밝게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히 살고 싶었다.
물질적인 것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마음을 얻고 싶었다.
물질적인 것은 마음과 다르다.
엄마가 해준 따뜻하고 맛있는 밥이 그리웠다.
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이젠 나도 지친다.


이 일기를 쓰고 나서도, 한 동안은 계속 꿈이길 바랬다.

하지만, 엄마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보면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알겠는데,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엄마 집에서 엄마, 아저씨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아빠 집으로 돌아와 나를 맞이하는 아빠, 아줌마를 보았을 때,

이렇게 하루에 4명의 부모님을 모두 마주하던 날에는 대체 이게 무슨 삶일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7개월이 지나 쌍둥이 동생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엄마가 그 아이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그 작은 아이들이 꿈뻑거리며 나와 눈을 맞췄을 때, 나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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