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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은 Aug 05. 2021

3. 나의 계모 이야기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나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에, 나는 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 아줌마가 함께 살고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원치 않게 엄마와의 이별을 겪은 14살의 나를 마주한 아빠의 여자친구 아줌마는 며칠을 내리 우는 내 모습에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친엄마와 계모의 간극은 절대 채워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한 편으로는 그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함에,

그리고 그 빈자리로부터 오는 결핍의 바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마음이 쓰이시리라, 그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숨죽여 울기 위해 노력했지만 눈물 젖은 딸꾹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자친구 아줌마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그 모습을 들키게 되었다.


아빠의 여자친구 아줌마는 감사하게도, 나를 재촉하거나, 은근한 기운을 보내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일정한 그 위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온전히 받아들여 주셨다.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이었다.

알뜰살뜰하게 나를 챙겨 주셨고, 특유의 유쾌함으로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셨다.

진작에 나를 ‘딸내미’라고 칭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고, 고마우신 분이다.)


사실 그분의 따뜻함 덕에 마음의 문은 어떠한 계기 없이도 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장벽에 스스로를 가둔 나는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다.

그랬다고 싫어하거나, 원망하거나, 뾰족하게 굴진 않았다.

 지내려는 모습을 내비치면서도, 그저 살갑게 굴진 못했다.


여자친구 아줌마를 ‘엄마’라고 칭하는 일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굉장히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세상에 두 엄마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미루고, 피하고, 모른 척했다. 그 때 당시의 나의 그릇은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특정한 호칭 없이 유야무야 지내다가, 25살무렵이 돼서야 비로소 ‘엄마’라는 호칭을 조금씩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 익숙하고 쉬운 것은 아니나, 나를 딸로서 인정해주시고, 그동안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과 감사함으로 적어도 피하지는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전 엄마’라고 소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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