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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은 Jul 29. 2021

2. 나의 계부 이야기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나


중학교 1학년이 되기 전 겨울방학, 나는 아빠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꽤 독립적이고 활달한 아이였지만, 한 편으론 엄마에게 굉장히 의존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것은 곧 나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보러 오겠다며 나를 달랬다.


하얗고 네모난 가구들로 꾸며진 내 방에서 나는 이사 첫날부터 눈물로 습도를 올렸다.

안타깝게도 그 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이 최악인지라, 아무리 작게 울어도 안방까지 소리가 퍼져 나갔다.

며칠을 듣다 못한 아빠는 내 방으로 들어와 다시 엄마에게 돌아가라고 소리치셨는데, 나는 그 말이 오히려 너무 기쁠 정도였다.


다행히 입학한 중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친) 엄마 없는 생활을 적응해 나갔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가을에, 이모에게 엄마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고, 그러다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고, 아빠로 인정하지 못했었다.

(이건 아줌마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가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엄마가 너무 소중해서, 엄마가 아무에게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감정은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 동생들이 칠삭둥이로 태어나고, (동생들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돌보는 엄마를 보았는데,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아기들을 보며 기쁜 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이렇게 기쁘게 웃는 걸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 웃음을 보고, 이 아이들을 동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아빠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저씨를 아빠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음과 머리와 행동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저씨를 제2의 아빠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라고 칭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혼자 슬슬 눈치를 보며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노력했었다.


그리고 비로소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 기뻐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나는 그 모습에 적잖이 놀랐었는데, (왜냐하면 당사자는 오히려 덤덤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런 나에게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지금은 평택에 사시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말할 때는 ‘평택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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