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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은 Mar 24. 2023

신입한테 잘해줘 봤자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신입사원 살아남기 프로젝트

1. 인수인계에 진심이었던 사람


실험실 생활을 마무리 짓고 나오기 전 일주일 동안 인수인계 내용을 작성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어느 파일이 어디에 있고, 어느 내용이 어디 있으며, 참고할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메모장, 그리고 메일로 하나하나 다 적어서 공동연구자와 부사수에게 넘기고 왔다.


'학교'라는 공간의 특성상 그랬던 건지, 아니면 나의 성향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인수인계를 꼼꼼하게 하지 않았을 때 오는 결과물을 생각해 보면


(1) 후임자가 나에게 연락해서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스트레스

(2) 연락을 받고 답변주기까지 걸리는 시간

(3) 내 기억이 점점 잊혀져가거나 변형되는 것에 대한 리스크

등등등.


모든 것을 따져봤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2. "회사는 학교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공'자 붙는 회사들의 공통점일까?

어째서 조직개편 통보 이후 하루 만에 부서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대적 조직개편+업무개편+기피부서배치가 한날한시에 이루어진 최악의 조건에 놓이게 되었고,  

신입을 챙겨주거나, 꼼꼼히 인수인계 할 여유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상황 속에서,

눈물콧물 쏙 빼며 인턴 생활을 했다.


심지어 내가 있는 부서는 다른 부서와 다르게 담당자가 굉장히 독립적으로 일하는 구조여서,

나는 오롯이 내 담당 업무를 정, 부 없이 혼자 해내야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를 해야 하다 보니,

실수도 많고, 일을 숙지하기보단 기계처럼 전의 문서를 곧장 따라 하며 일을 쳐냈다.

보고하는 방법도 잘 몰라서 어버버거리고 있으니, 팀장님께 결국 한 소리를 들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에요."


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랬다고 내가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니라 너무 억울했다.

부서 배치 이튿날부터 매일매일 야근하고, 설날에도 집에서 일했는데.

가이드라인, 매뉴얼 읽어볼 시간도 없이 기한이 촉박하게 주어지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지.

부장님이 해주는 인수인계가 잘 된건지 아닌지 고작 한 달도 안된 신입이 어떻게 판단하라는건지.


아, 근데 또 본인도 그 말을 들었다는 동기 선생님의 말은 어찌나 웃픈지...







3. 신입한테 잘해줘 봤자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나만 바쁜 게 아니고, 나만 야근하는 게 아니고,

나만 조직개편의 피해를 받고 있는 게 아니고,

그리고 뭐, 신입한테 잘해주고, 끼고 가르친다고 해서 내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수인계 꼼꼼히 해준다 해서 성과급 주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생각해 보니,

모르겠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해주는 옆 자리 선생님이 고맙고,

일 배우러 따라가도 되냐는 걸 귀찮아하지 않고 흔쾌히 응해준 차석 선생님도 고맙고,

실수하고 빼먹어도 항상 괜찮다고 말해주는 뒷자리 선생님도 고맙고,

다른 사무실인데도 메신저로 질문하면 내가 있는 사무실까지 와주시는 선생님도 고맙고,

괜히 음료수 하나 들고 와서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살펴봐주는 선생님도 고맙고,

같이 잘 모르는데도 서로 해본 부분 채워가며 으쌰으쌰 하는 동기 선생님들도 고맙다.


감정의 기복이 있으시긴 하지만, 곤란한 일은 해결해주려고 하는 팀장님도 감사하고,

고군분투 한 날엔 어떻게 아시는지 고생했다고 연락해 주시는 실장님도 감사하다.







4. 아무튼 (내일도) 출근


싫으나 좋으나, 나는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회사에 고마운 사람이 생기니, 조금은 용기가 난다.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내일은 더 잘 해내야겠다고 마음도 먹어본다.


아무튼간에, 오늘은 푹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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