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끔 늦은 저녁 들고 온 베스킨라빈스 봉지에는 아이스크림 보다 나의 입맛을 이끄는 연기 나는 뜨겁도고(?) 차가운 작은 빙산조각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바로 '드라이아이스'!
31가지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드라이아이스가 야속하기도 했는데, 때로는 조금 남은 이 작은 빙산조각을 가지고 엄마가 설거지하려 담아둔 물에 넣어 보기도 하고 몸에 바르는 로션을 그 위에 짜보기도 하다 엄마에게 등짝스메싱을 맞기도 했다.
어릴 적 추억의 챕터에 잠겨있던 이 '드라이아이스'는 나이가 들어 심리상담을 받던 어느 날 내 삶에 다시 소환되었는데, 바로 감정에 대한 분석을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살면서 항상 감정과 기분, 생각, 마음, 느낌에 대해 때로는 그 모호함에, 또 어떤 때는 그 명징함에 궁금증과 미해결과제가 컸다. 이에 약학대학을 다니면서도 핵심감정과 내면아이 관련된 상담을 받기도 했고,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면허 취득 후에는 식약처 기관에 근무하면서 대한한방신경정과학회에 가입하여 한방과 신경정신학을 함께 분석하며 내 안의 해결하지 못한 오래된 감정과 상처나 기억을 탐색하고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졌었다.
한 번의 상담으로, 혹은 하나의 심리학 이론으로 과거의 아픔과 트라우마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내 심장을 스친 그 감정에 대해 의식하고 관심 갖는 그 행위 자체가 나를 구해내는 과정임을 배웠다.
- 매 순간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 옳고 그름의 선 vs 악 구분이 없고 - 그로 인한 말과 행동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구별이 없으며 - 인간의 실존적인 핵심
우리는 자라오면서 감정은 "드러내면 안 되는 것, 어린아이 같은 것, 억제할 줄 알아야 어른, 버려야 하는 것.." 등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 익숙해져 왔다.
그러나
감정은 마치 '드라이아이스' 같아서 내 마음속에 있을 때엔 드라이아이스가 물에 있을 때처럼가슴에 부글부글 끓다가, 정확히 그 감정을 스스로 인지하고 알아주어 꺼내주면 물에서 달달 요동치던 드라이아이스를 공기 중으로 빼낸 것과 같이 바람 따라 승화되어 사라진다.
그렇기에 내 마음에 생겨나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거나 외면하면 신체화(두통, 가슴 답답함, 소화불량 등 불안신경증 및 심신증으로 나타나는 신체증상)나 인지오류 등으로 왜곡된 심리적, 신체적, 관계적 부작용이 내게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감정'을 정확히 보는 것은 곧,
= 나를 보는 것= 나를 관찰하고= 나를 탐색하는 과정
= 나를 이해하게 되어= 나를 수용
= 나를 사랑하는 실존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쩌면 근대 철학의 선구자인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의 제1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존재한다'를'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존재한다'라고변주해 본다.
그렇다면 이 감정들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생겨나서 내게로 오는 걸까?
그것은 바로 '욕구'
나의 인생의 역사에서 갖게 된 욕구들로 점철된 '나'라는 사람은 이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vs 충족되지 않았을 때에 따라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마음에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내가 느낀 방금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인지하는 것.
나의 감정의 종류를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인 자존감을 견고히 해줄 것이기에.
하지만 우리는'감정'을 감추고 억압하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비하며 산다고 한다. 마치 물이 가득 찬 큰 대야에 바람이 부푼 큰 풍선을 억지로 집어넣듯. 그 벅찬 압력은 어디로 갈까?
나는 서울의 홈플러스의 마트 약국에서 1인 근무를 하며 코로나19 시국을 맞았고, 대학병원 원내약국에서 하루에 200명가량의 환자에게 투약과 복약지도를 하며 수많은 감정의 비빔밥을 맛봤다.
지금 지나간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미쳐 확인할 새도 없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의 말과 표정과 제스처에 헤어릴 수 없는 모욕과 상처를 받지도 하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만과 편견에 휩싸여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들의 마음에 감정을 전하며 생체기를 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어느쯤에는 의료인으로서 업무진행 시에는 감정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 전문적인 것일지 고민하기도 했다.
마음은 언제나 옳다.
[당신이 옳다-정혜신]
정신과 의사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 심리 치유 공간을 설계하고 공감의 힘을 전파하는 정해신 저자의 치유적 내공의 집대성. 책 [당신이 옳다]에서는 내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은 그러한 생각이 들기까지 나 자신에게 그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심리적 인과성을 나 스스로 수용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것.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바로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감정'이 바로 존재의 핵심인 것이다.
감정이 옳다는 것이 행동의 모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지와 그저 내 마음에 '감정이 일어난 현상 자체'는 언제나 옳다는 것. 언제나,
나에게 생겨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지하는 그저 그 과정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외친다.
내 심장에 박혀 달달 들끓고 있는 케케묵은 감정의 빙산, 그 드라이아이스를 이제는 명확히 꺼내 저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휘발시켜 날려 보내줄 시간이 나를 지킬 것임을 이제는 안다.
감정을 차분히 확인하며 감정일지를 쓰다 보면 이런 과정을 꼭 해야 할까,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지 않기도 하고 갑자기 감정이 왁 터져 나와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부정적인 감정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드러나 억제하느라 더욱 섬세히 내 마음을 들여봐야 하는 때도, 감정이 나를 무기력하게 할 때도 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저항'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치유가 진행 중이라는 신호이라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통한 탐색을 통해 우리는 감정을 직면하고 비로소 자신의 길을 이어 갈 수 있다.
한의약에서 여성의 뭉친 혈을 풀어주며 기를 돌려 여성질환에 약효를 나타내는 '향부자香附子'의 그 약효는 바로 휘발성 성분인 세르퀴테르펜이라는 정유성분에서부터 온다. 향부자를 끓이며 달이고 마침내 그 정유성분이 명징히 내 몸에 작용하고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치료의 향연.
어쩌면 마음의 보약 한 모금은 심장에 달라붙어 있는 불청객 같은 그 어느 해 생긴 감정을 명징히 알아주고, 마침내 휘발시키면 그 맛은 쓰지만 영혼에는 달디단 그 보약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