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2014년 와이프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순간에서 영원을 보게 해 주었던 그녀는 예뻤다. 그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열망이었을 뿐인데. 그녀도 나도 신혼의 달콤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현실에 파묻힌 그렇고 그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동시대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2016년.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2017년 둘째 아이가 아내의 뱃속을 새롭게 차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녀는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철없던. 정확히는 철없고 싶어 했던 나는 어른이 되어 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찰나의 행복과 오랜 시간의 고통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나기까지. 아이의 성장은 곧 보호자의 손길이 조금씩 덜 가게 되는 말과 동의어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태어나서부터는 아이는 전적으로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이 모든 게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오랜 시간의 고통을 충분히 잊게 해 줄 만한 찰나의 행복을 아이로부터 받았을 수 있어서 괜찮았다.
그 찰나의 행복에도 돈이 필요한 걸까. 아이는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모든 것에서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 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초라함과 함께 그렇게 제공해도 모자랄 판에 소중한 돈을 날렸다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지난 몇 년이 스쳐 지나갔다. 난방도 안 틀고, 옷도 안 사 입어서 얼마나 아꼈을까. 그 세월은 뭘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수백만 원을 아끼자고 애써왔는데 3천만 원을 날려버린 걸까. 이런 생각은 곧 자책으로 이어졌다.
아니 내가 미쳤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품에 어떻게 3천만 원을 넣은 거야. 차라리 오피스텔 주택담보대출이나 착실하게 갚을 걸. 한심하다. 한심해.
눈물이 나오거나 죽고 싶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정적 단어가 나를 휘감았다.
한심하다. 어리석다. 멍청하다. 후회된다. 미쳤다. 제정신이냐. 무슨 생각이냐. 무능력하다. 이런 말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고 그런 단어를 사용할수록 국어사전에 나타난 유의어를 찾아내듯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언어로부터 나는 휩싸여 있었다.
아이와 놀다가도 화가 났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이렇게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저 그런 중산층으로 남게 되는 걸까. 답답하고 답답했다.
수년 동안 옷도 제대로 안 사 입고, 아끼며 살아왔던 내가 한심했고,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어설프게나마 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별다른 성과도 없었다. 대신 내 것 말고 다른 이들의 자산은 억 단위로 가격이 올라가는 것을 허탈감을 갖고 보고 있었다.
매일이 초조했다. 매일 불안했다. 누 군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상대적으로 퇴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작아졌다. 한 없이 작아졌다. 와이프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면서 대인배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속은 쓰렸을 테지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작아졌다. 와이프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작아진 자존감은 투자를 넘어 일상을 전이되었다.
육아서도. 직장에서도. 관계에서도 나는 패배자였다.
어쩔 줄 모르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한 없이 작아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