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어른들. 노인들은 대부분 무기력했으며 과도하게 진지했고 웃어야 할 때 웃을지 몰랐으며 어제와 내일이 같았다. 그들을 비하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런 마음보다는 내 노년은 그들과는 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기를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중학생 때였고, 고작해야 아버지는 40대였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드셨고,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아빠. 술 좀 줄이면 안 돼?"라는 말을 했고. 아버지는 내게
"아들아. 아빠는 앞으로가 더 달라지고 새로울 게 없어. 술을 마시는 건 아빠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야"
별 것 아닌 말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충격이 컸다. 아. 40대가 되면 더 이상 변할 게 없구나. 그게 진리 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면 그게 진리가 된다.
나도 어른이 되었고. 내 밥벌이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갔고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되고 나니 그럭저럭 밥벌이를 할 수 있었지만. 아빠가 말한 '달라지고 새로울 게 없어'라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교사의 하루는 어제와 오늘이 같았고 1년을 한 싸이클로 해서 아이들을 사고 없이 무사히 올려 보내면 그게 잘한 일이었다.
물론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 하나하나의 성장을 이끌어 내는 고귀한 직업이다' 이렇게 교대에서 배워왔지만 현실은 이상보다 크게 다가왔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며 교직에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교직이 내게 있어 생존수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제와 오늘이 같았던. 오늘과 내일도 같았던 내 아버지의 모습.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감은 조금씩 의구심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던 중 P2P사기를 당했고. 나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나도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같은 삶을 살아가겠구나. 나이 든 어른들이 웃어야 할 때 웃지 않는 것은 인생의 고단함이 축적되어서였다. 과도하게 진지한 것은 가벼움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였다. 그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삶을 따라가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무기력은 패배감을 낳고 패배감은 더 큰 무기력을 불러온다. 침잠하고 있는 나를 꺼내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다. 직장상사는 더더욱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딱 하나. 아들이었다.
나는 아들을 사랑했다. 아이는 유독 아내의 얼굴을 닮았다. 특히 아내처럼 눈웃음이 이뻤다. 크게 웃을 때면 아내는 콧잔등에 주름이 생기곤 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아이가 웃을 때 콧잔등에 생기는 그 주름이 난 좋았다.
나는 아들을 좋아했다. 아이는 유독 내 성격을 닮았다. 마음이 여리고 잔정이 많았다. 지금도 동생을 혼내면 정작 동생은 울면서 소리 지르는데, 큰 아이가 좌불안석이다. 난 그 아이가 나를 닮은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아버지를 닮아 평범한 인생을 사는 건 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진난만하고 세상의 풍파를 겪어보지 않은 아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의 무게 앞에 고개 숙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이 슬픈 생각이 들었다.
헬로카봇을 만지면서, 레고 블록을 조립하면서 어른들의 눈에 보기엔 부질없어 보이는 그런 행위들을 하면서. 쉽게 말해 돈이 되지 않는 그런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아이가. 언젠가는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학교에 입학하고 입시를 준비하며.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나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아이가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 때면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어른이 되었을 때의 고단함을 순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 때문이다. 아이가 철들지 않았으면. 그게 어렵다면 최대한 늦게 철들었으면 한다. 그걸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멋지지 않은 내가 아들에게 멋지게 살아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멋지게 살아가려면 아빠인 내가 멋있어야 했다. 나는 그래서 달라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