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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YMassart Jul 13. 2022

위로를 받기 위한 위로

Y. Y. Massart, <비극의 주인공>, 2022년 6월




‘벗들 사이에는 나의 적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말을 건넬 수 있는 자이기만 한다면 그가 누구든 이제 마음껏 사랑하리라! 나의 적들도 나의 더없는 행복의 한 부분이 아닌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가 떠난 후, 나는 위로를 받아야 할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인들은 나를 위로했고 나의 안부를 걱정했다. 그렇게 3년을 지냈다. 그 가운데 몇몇 지인은 받아들이기 불편한 위로를 했다. 나의 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하는 지인의 위로는 아픈 내 가슴에 날카로운 가시를 박았다. 상투적인 위로의 말과 함께 이어지는 섣부른 충고는 나의 울적한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랬다. 그 지인은 나의 비극에 위로를 받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나의 아픔도 이해한다는 지인의 말.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거짓의 소스가 잔뜩 들어간 위로의 말들은 어색했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듣기만 했다. 그럼에도 위로를 받기 위한 위로를 건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니체의 말처럼 나의 더없는 행복의 한 부분이란 생각을 나 자신에게 강요해 본다.


타인의 불행으로 자신의 삶에 안도감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 자신의 고민을 타인의 아픔에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나를 포함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이 어설픈 마음씨. 못된 심보는 인간이 미숙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그 심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질투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의 조건에서 이탈된 사람이다. 질투는 자기가 가진 것에 즐거움을 찾지 않고, 남의 소유물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굴드). 그리고 맞다. 질투는 남의 불행에 위안도 받는다.


치유되지 않은 자신의 불행의 뿌리를 위로하기 위해 아픈 사람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행동. 그렇게 반복되는 가짜 위로는 반복되는 허무일 뿐이다. 살다 보면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 때가 있다.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며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힘들어도 스스로 이겨내며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을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려 노력하지 않고 타인의 불행에 의존하면 결코 자신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말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의 행복이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려고 하였다면 그 자신에게도 그만큼 행복이 온다.’ 그렇다. 마음가짐이 곧 행복임을 깨달으면 마음에 평온이 날아와 살포시 앉는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 내 삶이 누군가에겐 위로를 가져다준다. 짧은 행복을 느낀 그 누군가를 니체의 말처럼 사랑하리라!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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