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는다. “알맞은 때에 죽도록 하라!”는 가르침은 아직도 낯설게 들린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과연 그 알맞은 때는 언제란 말인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실은 알지만 언제가 알맞은 때인지는 모른다. 운명은 인간에게 그 시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소리 소문 없이 닥칠 뿐이다. 자신의 죽음은 운명에게 맡기고 오늘을 산다. 그렇게 오늘을 살던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나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거라면 어떡할까? 그 또한 운명이 개입한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너는 운명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 끔찍한 날부터 나는 가해자란 주홍글씨를 내 가슴에 새겼다.
알맞은 시간 알맞은 장소
너는 며칠 전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습관성 두통으로 고생한 너였기에 나는 저러다 나아지겠지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너의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 가자고 하면 늘 거절하던 너였는데 얼마나 아팠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때 나는 너를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 뇌혈관 CT 또는 MR을 찍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동네 한의원에서 치료받자고 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다 쓰러진 너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즉시 춘천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의 응급실로 옮겨진 너에게 내려진 병명은 지주막하 출혈이었다. 너에게서 골든타임을 빼앗은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그랬다. 너는 나 때문에 타국에서 죽었다.
응급실 의사는 나에게 왜 한의원으로 갔냐고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울기만 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로 인해 자신이 다칠 수도 있고 타인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실수를 저지른 후에 인간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책의 시간을 보낸다. 자기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실수를 자기 몫으로 감당해냄으로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살면서 실수를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또한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가 한 인간의 죽음을 초래했다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무엇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너의 죽음은 그 어떤 변론도 가능하지 않은 자책의 세계로 나를 추락시켰다.
가해자가 된 나는 매일 이 문장을 반복하며 가슴을 쥐어뜯는다. “알맞은 시간에 알맞은 장소를 선택했으면 너는 살 수 있었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1765년에 제작된 장-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1805)의 <새 죽음에 우는 소녀>를 소개한다. 흰색 옷을 입은 소녀는 새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함께 살던 작은 검은머리방울새가 죽었다. 소녀는 새장 위에 축 늘어진 작은 생명체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소녀의 애가가 화면 가득 울려 퍼진다.
그날 아침 일찍 소녀에게 새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집을 나서는 어머니에게 소녀는 걱정 말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나가고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 소년이 놀러 온 것이다. 평소 잘생긴 옆집 소년에게 관심이 많았던 소녀는 그의 방문에 들떴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행복한 하루였다. 오후 늦게 소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소년이 떠난 후 소녀는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무엇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떠올랐다. “아! 새” 소녀는 하루 종일 새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즉시 새장이 있는 방으로 뛰어갔지만 새는 죽어있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거운 죄책감에 소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새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소녀는 평생 가슴에 새겨진 이 죄책감이란 상흔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글을 각색했다.)
페이스북 최고 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는 자신의 저서 <옵션 B (OPTION B)>의 서문에 어느 날 닥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결혼한 지 11년이 되던 해, 그녀는 남편과 함께 멕시코로 여행을 떠났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부부는 친구들과 어울려 풀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셰릴은 졸음이 밀려왔다. 그녀는 남편과 친구들에게 “나 졸려요!”라고 말한 뒤 낮잠을 자러 홀로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한 시간 넘게 자고 일어난 그녀는 다시 풀장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여전히 풀장에서 놀고 있었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셰릴은 걱정하지 않았다. 헬스장에 간다고 한 남편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셰릴은 수영을 하며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샤워를 했다. 그녀는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전히 남편 데이브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데이브!”라고 소리치며 친구들과 함께 헬스장으로 뛰었다.
헬스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편의 얼굴은 푸른빛이 돌았고 머리 밑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셰릴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까지 가는 30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병원에 도착 후 남편은 의사들의 손에 넘겨졌다. 하지만 잠시 후, 의사는 그녀에게 다가와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인생은 깜박하는 순간에 끝난다.’라는 셰익스피어의 표현처럼 그녀의 남편 데이브의 삶은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셰릴은 매일 밤 헬스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편의 외로운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웠다. “왜 하필 그때 낮잠을 잤을까!”라는 후회는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에 낮잠을 안 자고 남편과 함께 헬스장으로 갔다면 살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나는 이 ‘만약에’라는 의혹 덩어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살릴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의문은 내 뇌리에서 계속 ‘혹시 내가 이런 선택을 했다면,,, 저런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추측성 상황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다. 자책과 후회 그리고 ‘만약에’는 끝없이 나를 괴롭히며 힘들게 한다.
너무나 힘들어하는 나에게 의사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아니면서도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착각을 하는 가족이 많아. 하지만 죽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너는 가해자가 아니야, 너 또한 피해자야. 너무나 슬픈 너의 남편 죽음에는 두 명의 피해자만 있을 뿐이야.!”
슬픔을 자책으로 왜곡시킨 셰릴도 의사에게서 나와 같은 말을 들었다.
“헬스장 바닥에 쓰러져 방치돼 있었던 것이 사망원인이 아닙니다. 함께 있었어도 당신은 데이브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의 친정 가족들 그리고 프랑스의 시댁 가족들 모두 한결같이 같은 말로 나를 위로한다. “세상을 떠난 자는 이미 정해진 운명을 따를 뿐이야!”라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운명이란 단어를 끼워 죽음의 시기를 합리화 하려 한다. 한 인간의 수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논리는 남겨진 자들을 위한 말이다.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겨진 자로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삶을 유지하려면 이 황당한 논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니체는 알맞은 때에 죽으려면 알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수명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대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오늘을 알맞게 충실히 살아내면 내일 죽는다 해도 운명에 짓밟히는 죽음이 아닌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나는 너를 잃었을 때가 나의 죽음에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아직 나의 때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