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것이다

by YYMassart
Y. Y. Massart, <가끔은 웃어도 돼!>, 2022년 1월




‘그대들의 삶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있어야 한다! 많은 작별을 하고 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최후의 순간들을 잘 알게 된다. 나의 모든 감정은 괴로워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나의 의욕(의지)은 언제나 나를 해방시키는 자로서 그리고 나에게 기쁨을 주는 자로서 나를 찾아온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 웃음소리가 참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소리만큼 행복한 것이 어디 있으랴! 나는 너무 행복했는데 이제 너의 웃음소리를 들으려면 컴퓨터를 켜야 한다. 저장되어 있는 동영상 파일을 고른 후 재생 버튼에 엔터키를 클릭한다. 화면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너, 너의 행복한 웃음, 함박웃음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진다. 나의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 몰려와 오열한다.


나의 웃음도 너와 함께 사라졌다. 네가 떠나기 전에는 나 또한 동영상 속의 너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거짓 웃음만 웃을 수 있다. 가슴에 뭉친 아픔을 뚫고 올라올 수 없는 웃음을 나는 거짓 웃음이라 명한다. 지인들과 소통하며 내가 웃을 수 있는 웃음은 오로지 거짓 웃음뿐이다. 단단하게 경직된 내 웃음에 나 또한 너무나 어색하다.




존 테니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체셔 고양이의 웃음>, 1865년




체셔 고양이의 웃음

어색한 웃음을 생각하면 삽화가 존 테니얼의 체셔 고양이의 미소가 떠오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고양이이다.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는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나뭇가지에 앉아서 웃고 있는 체셔 고양이를 발견한다.


앨리스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줄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있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상한 나라에 떨어졌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야 옳은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나는 웃고 있는 체셔 고양이에게 나의 인생행로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내가 여기서 <웃을 수 있는 길>과 <웃을 수 없는 길> 중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줄래?”

틀림없이 체셔 고양이는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있지!”라고 식상한 대답을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오늘을 보낸다. 과거의 고통에 묶인 나의 머리와 마음은 오늘도 서로 상반된 길로 나를 인도한다. 양가감정 속에서 어지러운 나는 오늘도 오늘을 보내고 내일도 내일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괴로운 감정을 접어둔 채 니체의 조언을 믿고 따르는 날이 올 거라 믿어본다. 그때의 나는 나의 의지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나를 찾고, 감옥에 갇혀 있는 나의 감정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나를 찾을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사전적 의미로 비극이란 인생의 슬프고 애달픈 일을 당하여 불행한 경우를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비극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자신에게 떨어진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대응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서 남은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기본적인 깨달음은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즉 살아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닥친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란 것을 알려준 화가가 있다. 바로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이다.


여기 에곤 실레의 아내 에디트 실레를 소개한다. 화가는 1915년 6월 17일에 이 여인과 결혼했다. 그림을 보자. 아내는 흰색 블라우스와 세로 줄무늬 투피스를 입고 남편 앞에 섰다. 갈색 머리도 올렸고 빨간 립스틱도 발랐다. 남편을 응시한 아내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남편은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에곤 실레,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에디트 실레>, 1915-1916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화가 실레는 자신에게 동원령이 떨어지기 며칠 전에 에디트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불안한 삶 속에서 상실감에 시달렸던 실레는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1917년부터 차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제작된 작품 <어머니와 두 아이>와 <가족>이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화가는 가족에 대한 애정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1917년부터 작품 활동을 활발히 시작한 결과 대중적인 성공도 뒤따라주었다.


1918년 봄, 아내가 임신을 했다. 부부는 기뻤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실레 부부는 나름 성공한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행복도 잠시, 1918년 10월 28일,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 에디트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운명한다. 아내가 떠나기 바로 전날, 실레는 아내가 아기를 가졌고 스페인 독감에 걸려 위험하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임신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실레는 좌절했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내의 병상을 지켰던 남편 실레 또한 독감으로 3일 후에 죽는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조건이 있다. 그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면 안 된다. 오로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만 비극이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즉 행복-불행-행복으로 전개되면 안 된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운명만 비극이다.


아기의 탄생을 기다렸던 부부,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설렜던 부부. 모든 불행은 뒤로하고 순탄한 인생길만 남았다고 안심했던 부부. 그런데 20세기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은 5000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사실 이 통계 또한 사실 추정이 불가할 정도라고 말한다. 잔인한 운명은 전쟁으로, 팬데믹으로 수많은 가족들을 비극의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실레 부부 또한 그 비극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나는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내 작품들은 전 세계의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다.”

실레는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실레가 떠나고 11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 선언을 했다.


웃으면 죽어!

<웃을 수 있는 길>과 <웃을 수 없는 길> 중에서 웃는 길을 선택하면 살해된다는 내용의 영화를 소개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 <장미의 이름>이다. 이 영화는 인간은 행복해지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살인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수사들은 요한 계시록의 예언대로 악마의 시대가 열렸다고 두려움에 떨었다. 살인 사건의 전말 수사를 위해 수도사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드소가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들의 수사 과정을 전개하며 영화는 중세 시대의 종교재판으로 인해 마녀사냥을 당했던 사람들의 끔찍한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바로 늙은 수도사 호르헤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를 읽는 수도사들을 죽였다. 셰익스피어에 의하면 악인은 신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른다고 했다. 호르헤가 그랬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저 나름의 진리를 구축한 헛된 망령의 노예였다. 그에게 인간은 즐거운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희극을 논한 <시학 2>는 수도사들을 웃게 만들었다. 웃음이 악의 시작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그 책에 독을 묻혔다.


호르헤는 독으로 살인을 해왔다. 신을 위해 악을 물리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착란자 호르헤에게 윌리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다.”


늙고 눈먼 광신자 호르헤는 윌리엄과 논쟁을 벌였지만 그는 끝까지 선의 이름으로 고서적이 가득한 사서에 불을 지르며 악행을 저지른다. 그는 독이 묻어있는 책장을 씹어먹으며 불길에 휩싸여 죽는다. 그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을 다룬 서적 <시학 2>는 영원히 사라졌다.




Y. Y. Massart, <웃어!>, 2021년 6월




웃고 싶은 마음

창문을 열면 가끔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우리 집 담장을 넘어 들어올 때가 있다. 나는 타인의 웃음소리가 불편했다. 내가 아프면 모두 다 아파야 하나, 억지도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TV를 보다가 내가 실실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 꽂아둔 무거운 자책은 나를 꾸짖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이 싫다. 웃는 자신도 웃음을 꾸짖는 자신도 모두 싫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웃게 만들어야 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는 나를 사랑했다. 너는 나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물했다. 때론 엉뚱한 행동으로, 때론 엉뚱한 이야기로, 또 때론 엉뚱한 표정으로 나를 웃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 너에게 “하지 마!”라고 소리치면서도 나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는 나의 웃음소리를 좋아했다. 웃는 나를 보며 너는 행복해했다.


그랬는데 지금의 나는 <웃을 수 있는 길>과 <웃을 수 없는 길> 중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나의 이런 모습을 저 세상에서 지켜보는 는 얼마나 속상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망설인다는 것 또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살아 있다는 증거다.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란 의미이다. 불행한 삶에 떨어졌지만 나의 의지로 다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았다는 뜻이다. 실레 부부와 네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그 시간들. 나는 이 시간들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거짓 웃음을 웃고 있지만 언젠가는 조금은 편안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니체는 ‘용기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것이다.’라고 했다. 맞다. 웃는 것이 아니라 웃고 싶은 마음이 중요했다.


오늘 체셔 고양이에게 말해야겠다. 나는 <웃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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