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YMassart Feb 24. 2023

유산과 사별

슬픔은 우리의 품에서 사그라들었다

Y. Y. Massart,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날>, 2022년 12월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 방송에서 한 영화배우가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결혼도 아이도 원하지 않아요.”


방송을 보며 나는 당신도 아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라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둘의 삶에 만족했던 당신은 우리 둘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매기고 싶다고 말하며 아이 낳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어요. 나 또한 자연스럽게 당신의 뜻을 따랐죠.


그랬는데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나는 갑자기 아이를 원했어요. 그 시절 친정아버지를 잃고 삶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던 나는 내 삶에 전환점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때 나의 심경의 변화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잘 알아요.


난감한 처지에 놓인 당신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어요.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당신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죠.

“그냥, 아내의 뜻에 따라줘. 만약 계속 거절하면 아내가 너를 평생 원망할지 몰라. 게다가 너의 아내는 나이 때문에 임신은 힘들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아내의 말대로 해!”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당신은 정말 안심했죠.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당신은 조건을 내밀었어요. ‘우선 기한은 6개월로 한다. 만약에 6개월 동안 임신이 안 되면 포기한다. 그리고 병원의 의료 도움은 안 받는다.’ 나는 당신이 계속 싫다고 할까 봐 6개월이란 시간을 말했던 건데 그것을 조건으로 못박을 줄은 몰랐어요. 어찌 되었든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체결되었어요.


당신 친구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어요. 임신 테스트기에 그어진 두 줄. 당신은 정말 놀랬죠. 하지만 6주가 되던 때 나는 유산을 했고 다시 임신 또 유산. 그리고 또 임신. 세 번째 임신이 확인된 후 산부인과 의사는 나에게 임신 안정기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리고 한 달 후 우리는 태아의 우렁찬 심장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나는 벅찬 마음으로 다음 진료일의 예약까지 마친 후 당신과 함께 병원 밖으로 나오며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당신의 마음은 정말 복잡했을 거예요.


산부인과에 예약된 날짜를 이틀 앞두고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받았어요. 췌장암 투병 중이셨던 당신의 아버지가 위중하시다는. 나는 당신과 함께 시댁에 가고 싶었지만 절대안정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7시간의 긴 여행이 불안했어요. 나는 전화로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말했고 아버님은 우리에게 아이가 생겨서 너무나 기쁘다고 말씀하셨죠. 내가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라고 말하자 아버님은 그러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당신이 떠나고 다음 날 나는 혼자 산부인과에 갔어요. 그런데 의사가 나에게 끔찍한 말을 했어요. “태아의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네요.” 순간 나는 말을 잃었어요.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나의 모든 감정이 순간 멈추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의사는 다시 기계적인 말투로 오늘 피검사를 하고 5일 후에 다시 피검사를 하자고 하더군요.


현실감을 잃어버린 내가 그 5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단지 병원을 나오며 나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애원하듯 말했죠. “제발 다시 심장이 뛰게 해 주세요.”라고.


5일 후, 결과는 참담했어요. 의사는 태아가 삶을 멈췄다고 말하며 알약을 처방해 줬어요. 나는 겁났어요. 당신도 없는데. 저녁이 되어 약을 복용하고 기다렸어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2시간 정도 흐른 후였던 것 같아요.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어요. 피가 철철 쏟아졌고 너무나 무서웠고 너무나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잠시 기절했다 깨어난 나는 혼자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그날의 기억은 잊히지가 않네요.


너무나 무서웠던 나는 지인 크리스티엉 부부에게 전화를 했어요. 고맙게도 그들은 나를 데리고 근처 산부인과로 향했는데 산부인과의 문이 닫혀 있었어요. 다른 산부인과도 찾아갔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응급실로 가자는 지인의 말에 나는 다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그냥 빨리 침대에 눕고 싶었어요. 그들은 나를 집에다 데려다주고 떠났어요. 새벽에 어린 딸까지 데리고 와 준 너무나 고마운 분들 덕분에 나의 불안함이 많이 사그라들었어요.


밤새 몸과 마음은 고통에 시달리다 새벽녘이 되어 겨우 잠이 들었어요. 몇 시간 후 나는 눈을 뜨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어요.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당신은 나에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했고 나는 악몽 보다 더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고 말았어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경계선을 뛰어넘은 상황에 놓이자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우선 피 묻은 옷부터 버렸고 욕실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청소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전화해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말했죠. 당신은 말렸지만 묵묵히 당신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를 너무나 사랑해 주신 아버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했어요. 사실 유산하고 온 며느리를 바라보는 친척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피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덤덤한 모습으로 당신에게 가야 했어요. 몸도 마음도 추스르지 못한 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아버님의 장례식 날 나는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어요. 조용하고 경건하게 치러지던 장례식에서 동양인 며느리가 계속 울자 사람들은 힐끗힐끗 쳐다보았어요. 그러든 말든 나는 아버님을 잃은 아픔과 아이를 잃은 아픔을 주체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신도 정말 힘들었죠. 함께 있어줄 수 없었던 아내의 유산.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 모두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의 시간이었어요.


여보, 근데 그거 알아요. 나에게는 당신이 있었고 당신에게는 내가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 따뜻하게 보듬고 안아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했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잘 견뎌낼 수 있었죠. 나에게 찾아온 슬픔과 당신에게 찾아온 슬픔은 우리의 품에서 사그라들었어요. 여보, 지금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답니다.


인생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다고 한 당신은 그 일이 있은 후 10년을 더 나와 함께 살다 떠났어요. 여보 나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당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아이를 지키지 못 한 내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2023년 2월 20일

당신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아내가




추신

여보, 혹시 그곳에서 당신이 아버님을 만났으면 아버님도 이젠 아시겠네요. 우리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호텔 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