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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Oct 07. 2020

노벨 물리학상과 화장지 엠보싱 무늬

런던 러이프

노벨 물리학상과 화장지 엠보싱 무늬


카자흐스탄의 어느 교회 목사님은 창립 기념일 선물로 교인에게 국산 화장지 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거 화장실에서 쓰는 거(туалетная бумага) 아닙니다. 이거 질 좋은 한국산입니다. 이거 냅킨으로 쓸 수 있는 겁니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 화장지의 퀄리티는 카자흐스탄의 다른 화장지와는 레벨이 다른 것이었고, 카자흐스탄에서 팔던 웬만한 냅킨보다 퀄리티가 좋으면 좋았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형태가 화장지인걸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엠보싱이 멋지고, 종이의 재질이 좋아도 화장지가 냅킨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화장지를 선물 받은 성도들은 그걸 냅킨으로 썼을까? 아니면 그래도 화장지로 썼을까? 화장지로 쓰면서 한국식 앰보싱의 부드러움에 감탄했을까? 아니면 목사님 말을 무시하면서 죄의식을 느꼈을까?



BBC4 라디오를 틀으니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로저 펜로스 경(Sir Roger Penrose)이 나왔다. 89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젊은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나이가 들어서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 매우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젊어서 받았다면 연구에 게을러졌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자는 아직도 연구를 계속하냐고 물었고, 물론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노벨상 하나 더 타시라는 사회자의 덕담으로 전화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펜로스는 웃고 넘겼지만, 그게 그냥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는 영국인으로는 134번째 노벨상 수상자다.


로저 펜로스는 1997년에 마트에서 화장지를 사다가 깜짝 놀랐다. 킴벌리 클락스(Kimberly Clark)에서 만든 클리넥스(Kleenex) 화장지를 샀는데, 자신이 디자인한 기하학적인 무늬가 엠보싱 처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저 펜로스는 1979년에 절대 반복되지 않는 패턴을 만들어서 특허를 내놓은 상태였다. 아래 사진인데, 저것이 어떻게 반복되지 않는 패턴인지는 모르겠지만…




킴벌리 클락스가 클리넥스 화장지에 펜로스의 패턴을 집어넣었을 때, 로저 펜로스의 특허는 종료된 상태였지만, 킴벌리는 책임을 느끼고 그 패턴에 대한 생산을 중단했다. 소송은 끝까지 가지 않고 화해로 종결되었다. 끝까지 갔다면 킴벌리가 이겼을 것이라는 소수 의견도 있다. 공장에서 만드는 화장지의 문양이 반복되지 않는 패턴이 될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로저 펜로스는 다른 두 명의 학자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상금(12억 원)의 절반을 받게 된다. 나머지 절반은 두 명의 학자가 1/4씩 가지게 된다. 윔블던 테니스의 우승 상금은 매년 늘어나는데 노벨상 상금은 잘 늘어나지 않는 것 같다. 6억 원의 상금은 크다면 크지만, 그 명예에 비해서는 작은 것도 같다.

이참에 킴벌리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 기념 프리미엄 화장지를 출시하는 것은 어떨까? 로저 펜로스에게 디자인 사용료를 지불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걸 잔뜩 사놓고 화장지로 쓰겠다. 어쩌면 막내가 대학을 갈 때까지 그 화장지만 줄창 쓸 수도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만든 패턴이라면 기꺼이 냅킨으로 쓸 수도 있겠다. 아 그러지 말고, 냅킨에도 그 패턴을 찍으면 간단하겠지만 말이다. 물리학자라는 것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노벨상을 타든지 다시 한번 화장지가 나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벌어진다면 세상에 이야기가 풍성해질 것이다.



로저 펜로스가 로벨 물리학상을 타면서 1997년에 나온 클리넥스 화장지를 보유한 사람의 화장지 가치가 올라갈 것 같다. 한 도막씩 잘라서 기념으로 팔아도 되겠다. 물론 한번 사용한 것은 팔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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