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와해 그리고 언더독 정신
London Life
London Life
- (19) 축구, 와해 그리고 언더독 정신
내가 재미있게 듣고 있는 LSE의 강의 코스는 Cryptocurreny and Disruption이다. 처음에는 여기에 왜 디스럽션이란 단어가 사용되는지 몰랐다. 그러고 나서 보니 하버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코스 중에 디스럽션이 들어가는 것이 꽤 많다. Fintech and Disruption, Art and Disruption 등등.
지난 해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방해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방해받고 파괴된 삶 속에서도 새롭게 피어오른 것이 많다. 창조적인 파괴, 와해적인 혁신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잘 표현하는 말이 disruption이다. 우리 말로는 와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코로나 이후, 비트코인 이후, NTF 이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와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와해는 누구에게는 공포이며, 누구에게는 기회다. 공포가 기회를 누르면, 와해적인 혁신은 실패한다. 기회가 공포를 누르면,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가치의 네트워크가 생긴다.
뜻하지 않게 축구에서도 와해가 진행 중이다. 유럽 주요 리그의 엘리트 클럽이 자신들만의 리그인 슈퍼리그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창립 맴버는 슈퍼리그에서 절대 강등되지 않는 원칙을 정했다. 세계 축구팬들은 주중에 한 번은 맨시티와 바르셀로나, 첼시와 유벤투스, 토트넘과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되니 좋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되면 기존의 챔피언스 리그는 이부 리그가 되어 버리며, 유로파 리그는 포켓몬 팀들 간의 경기가 되어 버린다.
슈퍼리그가 출범하면 축구계의 틀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영국 축구계가 가장 크게 분개했다. 유럽 축구리그를 지배하고 있는 프리미어 리그의 우월성이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미어 리그는 슈퍼리그에 참여하는 팀을 5부 리그로 강등시킨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5부 리그가 프리미어리그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징계받는 팀은 그런 조치도 감당할 수 있다.
반발은 강력하다. 여론의 80% 이상이 슈퍼리그를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영국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막겠다고 나섰다. 이 정도면 football and disruption이다. 영국 정부의 반응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영국 축구팬의 반응이다. 거의 모든 축구팬, 심지어 슈퍼리그에 참여를 선언한 팀의 팬도 축구에 대한 모독이라며 성토하고 있다. 축구팬은 하나 같이 슈퍼리그를 돈의 장난, 탐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축구는 돈의 장난이 아닌가? 탐욕(greed)은 잘 절제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슈퍼리그만 탐욕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게임을 좋아하는 영국인에게는 언더독(underdog) 정신이 있다고 말한다. 약팀이 강팀과 싸워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간혹 이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골키퍼가 보여 주고 있는 정신이 바로 언더독 정신이다.
남극 탐험에 나섰던 스콧 대장의 팀은 준비 부족과 스콧의 판단 착오로 대원 전부가 남극점을 정복하고 돌아 오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스콧팀은 아문젠팀에 졌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스콧 대장이 언더독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이는 바로 영국의 정신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 또한 언더독 정신이다.
슈퍼리그는 언더독 정신을 잘 녹여내지 못했다. 약팀이 강팀을 만나 깨지고 무너지면서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팀에게만 특권을 부여했다. 사실상의 특권은 부인할수 없이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걸 형식적으로 고정시킬 필요가 있을까?
온라인 마켓과 블록체인의 도입으로 기존의 미술시장이 붕괴한다면, 새로운 질서는 기존의 특권을 형식적으로라도 와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핀테의 기술은 peer to peer를 적극 받아들여 제도권 금융기관의 특권에 도전하고 있다. 그것은 성공하기 어려운 시도지만, 명분을 가진다. 그러나 특권을 제도화하기 위한 disruption은 성공하기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 점에서 슈퍼리그는 오늘 발표한 형태로는 출범하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