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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Sep 10. 2021

구별짓기의 세상에 등장한 10대 소녀, 라두카누

London Life

구별짓기의 세상에 등장한 10 소녀, 라두카누

   

      

뉴욕 부동산 투자를 검토할 때의 일이다. 동시에 두 개를 검토했는데 프로젝트 명이 공교롭게도 첼시 빌리지와 그리니치 빌리지였다. 이것은 런던의 프로젝트인가? 뉴욕의 프로젝트인가?


첼시라는 단어가 가지는 구별짓기(distinction)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기에, 그리니치의 중심성을 잘 알기에 붙여진 이름일까? 미국 부동산에 영국 지명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에서 미국에게 영국이 가지는 의미, 뉴욕에게 런던이 주는 의미를 미뤄 짐작해 볼 수 있을까?


이런 시각을 영국 거주 외국인이 하는 허망한 구별짓기라고 할 수도 있고, 영국뽕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스포츠 세계에서는 어떨까? 많은 게임이 영국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곳곳에 영국식 구별짓기가 배어있다. 미국의 프로 골퍼는 브리티시 오픈(The Open) 우승을 염원하며, 미국의 아마추어 골퍼는 세인트 앤드루스와 카누스티에서 라운딩하기를 희망한다. 테니스도 윔블던(The Championship)이 US Open보다 권위를 가진다. 미국인은 자신들의 대회에 US를 붙이지만, 영국인은 자신들의 대회에 The를 붙인다. 구별짓기에는 영국인이 더 능한 것 같다.


물론 The가 붙지 않고 US가 붙어도 영국인은 미국이라는 세상에 큰 의미를 둔다. 영국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것은 뭐랄까, 시골에서 성공한 사람이 도시에서도 인정받는 의미고, 한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이 글로벌하게 인정받는 의미다.


찰리 채플린과 비틀즈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이 큰 의미를 가졌고, 모든 것에 시니컬했을 에이미 와인하우스에게도 그래미상은 큰 의미였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미국 선수에게 영국 대회가 가지는 의미보다, 영국 선수에게 미국 대회가 가지는 의미가 더 클 수 있다.


영국 프로골퍼 중에 가장 인정 받는 선수가 닉 팔도(Nick Faldo)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토니 잭클린(Tony Jacklin)일 수도 있다. 닉 팔도는 US Open 우승이 없다. 토니 잭클린은 1969년 브리티시 오픈을 우승한 직후인 1970년 US Open에서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머, 리 트레비노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그는 선수로뿐 아니라 단장으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라이더컵을 이끌어 미국을 상대로 연승을 일궈냈다.



테니스에서 영국 선수가 US Open에서 우승한 것은 오픈 시대가 개막된 이후로는 남자의 경우 앤디 머레이가 유일하다. 여자의 경우는 1968년 버지니아 웨이드(Virginia Wade)가 미국의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을 이기고 우승한 것이 유일하다.


잭클린과 머레이, 그리고 웨이드는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작위라는 것이 또 구별짓기의 끝판왕이다. 어느 분야건 작위는 전문가이기만한 전문가와 존경 받는 전문가를 구분하는 잣대다.


남자의 경우는 앤디 머레이라는 정상급 선수가 아직도 활약하고 있지만, 여자의 경우는 정상급 선수가 웨이드 이후에 나오지 않았다. 최근까지 조안나 콘타(Johanna Konta)가 영국 테니스 팬의 관심을 끌었다. 2019년 윔블던에서 직접 봤는데, 상대 선수가 백핸드를 집중 공격하니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자멸하는 모습들 보였다. 패배 후 유리 맨탈을 드러내며 취재 기자와 언쟁을 벌였는데, 뭔가 영국스럽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순간 나도 그녀를 구별하여 버렸다.


올해에 영국 여자 테니스에 엠마 라두카누(Emma Raducanu) 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A레벨 과정에서 수학 A*, 경제학 A를 받고 올 여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도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다. 라두카누는 영국 선수였던 덕분에 윔블던에 초청 선수로 참여할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탑 레벨을 보여주었지만, 메이저 대회에 걸맞은 체력을 갖추지 못했고, 4라운드 도중에 호흡곤란으로 기권했다.



US Open에는 초청을 받지 못해 예선전을 치뤄야했다. 예선 3 경기와 본선 6 경기를 한세트도 내주지 않고 이겨 결승에 진출했다. 메이저 테니스 대회 역사상 예선을 거쳐 올라온 선수가 결승전에 진출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다. 영국 스포츠 선수의 꿈인 US Open 우승을 18세의 나이에 달성할 수 있을까? 영국 테니스의 자존심을 살려 줄 어린 선수의 승리에 영국은 새벽부터 열광이다.


영국뿐 아니다. 샤라포바와 윌리엄스 이후 절대 흥행카드가 부재했던 여자 테니스계에 라두카누의 등장은 큰 뉴스다. 그녀에게서 모니카 셀레스의 향기가 난다고 하면 설레발일까? 모니카 셀레스도 이맘 때 US Open을 우승하지 않았을까? 라두카누가 셀레스처럼 연전연승을 구가한다면, 그녀는 테니스의 고향 영국 선수이기에 변방으로 취급받는 유고슬라비아 선수보다 더 큰 인기와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조코비치가 역대급 선수가 되었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라두카누가 조코비치 급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루마니아인이고 어머니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인기와 상품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세상은 변했다. 누구에게나 다짜고짜 출신을 물어보는 것은 구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세상에 구별짓기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바닥에서 어디 출신이란 것은 어느 단계에서는 여전히 중요하다.



London Life 2.0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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