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채무 불이행과 금융위기의 역사

by 유우리

러시아 채무 불이행과 금융위기의 역사 1:

제정 러시아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국내에서 감이 아주 좋은 어느 투자자 한 분이 이런 것을 묻더라고요. ‘지금 할인되어 거래되는 러시아 국고채와 러시아 자원 기업의 채권을 매수해 보는 것이 어떨까?’ 저는 자칭 러시아 전문가이자, 자칭 금융시장 전문가로서 단호히 말했지요. ‘안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란 사실도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뭔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말할 때는 십중팔구 틀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러시아 금융의 역사를 조금 떠들어 보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사는 것도 괜찮겠다’입니다. 의외지요? 왜 그럴까요? ’러시아 채무 불이행과 금융위기의 역사’에 관하여 시리즈로 간략하게 써 볼까 합니다. 시리즈는 아래와 같은 구성입니다.


시리즈1, 제정 러시아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시리즈2, 구소련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시리즈3, 1998년 모라토리움에 관하여. 시리즈4, 2008년 금융위기에 관하여. 시리즈5,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의 재정 상황에 관하여.

첫번째 이야기, 제정 러시아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19세기 말에서 1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14년까지 러시아 황실은 유럽에 많은 채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 채무의 80%는 프랑스에 지고 있었고, 14%는 영국에 지고 있었고, 나머지 6%를 기타 나라에 지고 있었습니다. 그 채무는 1차 대전을 치르면서 크게 증가했습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러시아가 영국에 진 채무가 8800억 원, 프랑스에 진 채무가 8000억 원, 일본에 진 채무가 1800억 원에 달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세계 최대 채무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채무를 러시아는 갚았을까요? 갚지 않았을까요?


일단 레닌의 소련은 이 빚을 갚지 않았습니다. 역시 공산당은 패기가 좋습니다. 볼셰비키는 이 빚을 갚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 정부와 외국인이 보유한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합니다.


제정 러시아 채권을 보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이었고, 개인은 소련에게 청구권을 행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영국과 프랑스에는 러시아 황실, 러시아 기업 및 러시아 귀족이 보유한 재산이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재산을 몰수하여 손해를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압류한 러시아 재산으로 러시아 채권 보유자의 손실분을 상당 부분 보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러시아 채권을 보유한 프랑스인은 이를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소련 시절에는 한 번도 채무 변제를 공공연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들도 잘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손실을 보전받은 영국 채권자는 채권을 영국 정부에게 양도하였고, 영국 정부는 싼 가격에 채권을 시장에서 매각했습니다. 그걸 헐값에 매수한 사람들은 기존 프랑스 채권자들이었죠. 프랑스 채권자들은 러시아 정부가 갚아야 할 채무의 총액은 이자까지 합하여 48조 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떡입니까? 러시아가 80년 전의 채무를 변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파렴치한 공산국가 소련에 비하면, 옐친의 러시아는 천사와 다름없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96년에 일 년에 1 200억 원씩 4년에 걸쳐 4 800억 원을 변제할 것을 프랑스에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 정부와 일부 채권자의 뜻이었고, 그 제안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프랑스 채권자는 여전히 많습니다. 나머지 금액을 변제하라는 목소리는 지금도 높습니다. 대일본 청구권 협상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정서적으로 법적으로 여러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푸틴의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 시절의 대외채무에 대한 논의는 끝났다는 입장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안 갚은 것도 아니고, 갚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열심히 갚았습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의 빚도 부분적으로 갚았는데, 현 러시아 정부의 대외채무 96조 원을 갚지 않을 것 같지는 않군요. 지금은 제재로 묶여 있어서 그렇지만, 러시아 외환 보유고는 전 세계 5위라고 하니까요.


국가 간 빚이란 생각보다 떼먹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련이 망하면서 소련 시기에 졌던 빚을 갚는 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도 등장합니다. 그것은 다음 시리즈에서 다루겠습니다.


-시리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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