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by 유우리

소련의 대외채무에 관하여

(러시아 채무 불이행과 금융위기의 역사 2)

90년대 초반 소련, 모든 것이 암담했다. 매대가 텅 빈 상점과 길게 늘어선 줄에는 어떤 희망도 없었다. 1990년에 맥도널드가 모스크바에 1호 점을 냈을 때,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섰던 어느 시민은 그날에 먹었던 햄버거와 밀크 셰이크 맛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천국의 만나 맛이 이런 것일까?’ 이틀 전인 3월 8일에 맥도널드는 러시아에서의 영업을 중단했다. 정치한 지 22년밖에 안된 푸틴 대통령은 여러모로 소련을 소환하고 있다.

# 윤석열 정부에 주는 함의

소련이 망했을 때, 소련의 대외채무는 대한민국에 진 빚 1조 8천억 원을 포함해 총 120조 원이었다. 당시로서는 무척 큰돈이었다. 러시아는 이 빚을 갚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놀랍게도 거의 다 갚았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진 빚은 아직도 다 갚지 않았다. 여기에 사소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국제정치적 함의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발견하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허당일 가능성이 높다.

# 핵 폐기와 교환될 수 있었던 소련의 빚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련이 120조 원의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마트한 어느 서방의 관료는 소련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빚을 탕감해 주자고 제안했다. 당시 소련에 무려 45 000기의 핵무기가 있었는데, 한 대에 26억 원을 쳐주고 폐기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안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 제안은 심각히 고려되지도 못했다. 채무자가 빚을 갚을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빚이 오래되면 채무자는 그것을 원래 자기 돈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화 타짜에서 곽철용이 하는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원래 내 돈 아니냐? 이 경우는 쇼당이 안 붙지!”

# 러시아가 진짜 빚을 다 갚았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는 보다 긴밀하게 서방세계와의 연결을 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1996년에는 놀랍게도 제정러시아 시절의 빚도 일부 갚았다. 2000년 들어 유가가 상승하고, 러시아 정부의 재정이 좋아지면서 빚을 갚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러시아는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 진 빚도 갚았다. 이 경우는 채무국도 없어지고 채권국도 없어진 독특한 상황이었다. 소련을 러시아가 승계한다고 치더라도 채권국인 유고슬라비아도 없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러시아는 독립한 개별 국가를 일일이 찾아가서 갚았다. 2017년에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에게 1 530억 원을 갚으면서, 러시아는 소련이 전 세계에 졌던 빚 120조 원을 모두 상환했다고 공표했다. 이 공표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의했어야 했다.



# 노태우 대통령의 경협 차관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에게 3.6조 원의 차관을 약속했고, 그중에 1.8조 원이 집행되었다. 당시 3.6조 원은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1/10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러시아는 이 돈에 대해 93년부터 상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 중 일부를 방산물자로 받게 되는데 그것이 일명 ‘불곰사업’이다. 문제는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방산장비를 전액 빚으로 상계처리하여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50%만 빚에서 탕감하고 50%는 오히려 우리가 현금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방산장비를 들여왔다고 해도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부품을 또한 비싼 가격에 미리미리 구매해 놓아야 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빚도 받지 못하면서, 의미 없이 외환보유고만 추가로 축 냈다. 그때는 다름 아닌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는 제정러시아 시절의 채무도 갚던 때였고, 우리나라는 IMF 사태 바로 직전이었다. 우리나라는 호구 중의 호구였던 셈이다.


# 노무현 정부에서의 채무 협상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에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다시 채무 상환에 합의했다. 당시 미납 원금에 이자를 합한 금액이 1조 6천억 원이었는데, 이 중에 1/3을 탕감하고, 1/3을 방산 장비로 받으며, 1/3은 2025년까지 장기 분할 상환하기로 합의해 주었다. 이 또한 호구 중의 상호구 합의였다. 러시아가 소련 시기 빚 중에 프랑스에 갚아야 할 돈은 58조 원이었는데, 러시아는 프랑스에게 47조 원을 현금으로 갚았고, 나머지는 현물로 갚았다. 러시아는 프랑스 빚을 애초에 다 갚았고, 우리 빚은 아직도 갚고 있는 중이다.


# 정신 승리 1, 국방에 도움이 되다


군사적으로 문외한이어서 불곰사업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북한의 무기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무기였고, 전력으로 쓰기에는 너무 적은 양의 무기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소련제 무기가 얼마나 우리나라 국방 전력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오랜 의문이었지만,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는 러시아 무기를 보면, 그런 의문은 확신이 된다.


# 정신 승리 2, 러시아 시장을 먹다


소련의 빚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너그러운 조치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우호적이 되었고, 이는 한국 제품의 러시아 진출 성공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한국의 외교 관료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과 LG, 현대차, 팔도 도시락, 오리온 초코파이가 러시아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채무의 너그러운 상환조건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승리다. 삼성의 핸드폰이 잘 팔리고, 현대차가 잘 팔리는 것은 제품의 경쟁력이지, 국가 채무를 탱크로 받고, 탱크 부품을 비싼 가격에 사주기 때문이 아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잘 팔리는데, 러시아에 더 많이 투자한 롯데 초코파이는 왜 안 팔리는 지를 잘 생각해 볼 일이다.


# 정신 승리 3, 대북 관계에 도움이 되다


노무현 정부에서 채무 상환 협상을 할 때는 북한 핵개발 이슈가 한창이었다. 러시아가 북한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바라던 때였기에, 우리나라가 러시아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무엇을 달성했느냐고 물으면 결과론이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인간 사회의 본성이 있다. 채무자는 채권자가 원금을 전액 탕감해 주지 않는 이상, 채무 일부를 면제해 주거나 납입 기간에서 사정을 봐준다고 하여 절대로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루 이틀은 고마워할 수도 있지만, 그 고마움은 삼일 이상 가지 않는다. 진보 정권은 아주 기본이 되는 인간 본성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한다.



# 외교는 단호해야 한다


사람의 기억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선택적이다. 국가의 기억은 백배는 더 그러하다. 국가는 참전하여 피를 흘려주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누구보다 먼저 뛰어와 주는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부채 상환할 때 사정을 조금 봐주는 것 따위는 기억하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빚을 조금 탕감해 달라, 탱크와 장갑차로 받아 달라, 빚을 조금 연장해 달라’라고 제안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했어야 하는 말은 이렇다. “푸틴 대통령님! 깔끔하게 남자대 남자로 정리해 주시죠. 북한이 소련에게 진 빚이 9조 원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통일되면, 저희가 깔끔하게 원샷으로 갚겠습니다. 북한산 도라지로 갚겠다는 제안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희가 통일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랬다면 푸틴은 2005년쯤이면, 우리 빚을 다 갚았을 것이고, 남한을 핫바지로 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북한이 러시아에 갚아야 할 빚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외교란 ‘누가 누구랑 얼마나 친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양국의 이익을 어떻게 맞추느냐’라는 문제라고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적이 있다. 정상끼리 같이 사우나하고, 채무 상환을 연장해 주는 것은 남의 다리 긁는 것이다. 다리를 긁힌 사람은 당장 시원해서 미소를 지으나, 다리를 긁어 줬다는 사실은 금방 잊는다. 양국의 이해관계를 큰 흐름에서 맞춰야지, 작은 흐름에서 맞추려고 하면 무시만 당한다. 대국은 눈치를 보는 나라는 더욱 짓밟는 경향이 있다.


#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우리나라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말 중에 하나다. 이 말이 ‘미국이나 소련이나 똑같이 나쁜 놈이다’라는 의미로 들렸다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 외교가 실패해 온 것이다. 미국을 믿지 말라는 것은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기지 말고 자립자강하라는 취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소련에 속지 마라는 말은 소련은 우리를 늘 속이려 한다는 말이다. ‘지금 소련이 어디 있냐?’라고 따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련은 부활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소련의 핵무기는 러시아에 있고, 소련이 우리나라에 진 빚도 러시아가 갚으며, 북한이 소련에 진 빚도 결국은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갚아야 한다. 고로 소련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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