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것은 환율이다: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에 대하여
(러시아 채무 불이행과 금융위기의 역사 시리즈 3)
시리즈 3은 최대한 짧게 쓸게요. 제 기억 속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재미난 이야기가 많지만, 그러면 책이 되어 버리겠습니다. 아쉽게도 다 각설합니다.
1998년 8월에 러시아는 루블화 채권에 대해서는 디폴트(부도, 돈 못 주겠다)를, 달러화 채권에 대해서는 모라토리움(지불유예, 돈 나중에 줄께)를 선언했습니다. 한 나라가 재정위기에 처하면, 달러화나 유로화 채무에 대해서는 지불유예를 선언하지만, 자국 통화 채무는 갚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른 나라 화폐는 공짜로 구할 수가 없지만, 자국 화폐는 공짜로(?) 찍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왜 그랬을까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소련이 망한 후에 러시아는 빠르게 자본주의 길을 갔습니다. 돈 되는 공장이나 기업은 고위 관료와 결탁한 세력이 재빨리 공짜로 가져갔습니다. 이걸 이름하여 사유화라고 합니다. 돈이 안 되는 기업이나 공장은 가동이 중단되어 실업자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도 났고, 재정 적자도 났습니다.
해외에서 달러화 채권을 발행해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빚을 안 갚는 러시아가 발행하는 채권을 누가 사주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1996년에 제정러시아 시절의 빚을 일부나마 갚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조금씩 해외에서 국채 발행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소꿉장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할 심산으로 루블화 채권을 찍어내게 됩니다. 수익률이 연 60%가 넘는 무지막지한 채권입니다. 해외 투자가들이 루블화 표시 단기 채권인 GKO에 투자하기 시작합니다. 수익률이 좋으니까요. 한국에서도 투자했습니다. 개미나 순진한 기관이 대우증권을 통해 러시아 은행으로 달러화를 보냈습니다. 루블화와 달러화는 달러당 5.3-7.1의 정해진 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환율에서 조금 손실을 봐도 60% 수익률 때문에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약속한 환율 밴드를 믿은 것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재정적자의 60%를 GKO로 메꾸고 있었고, 일 년에 채권 이자를 갚는 데에만 정부 예산의 35%를 써야 했습니다. 러시아가 이런 상황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1998년 여름이었습니다.
달러화 채권은 규모도 적었지만, 금리도 낮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갚을게’라고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것입니다. IMF로부터 지원받는 26조 원으로 단기 채권의 일부를 상환했고, 일부 채권자는 7-20년물 달러화 채권으로 바꿔 주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문제는 GKO라는 루블화 채권이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구조였습니다. 설령 루블화를 찍어서 갚는다고 해도, 그 돈은 시장에서 다시 달러로 바꾸어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시장에 달러가 없는 상황에서 루블화 환율의 로켓 상승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결국 못 갚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식적으로 루블화 채권이었고, 러시아 내부 문제처럼 보였기 때문에 IMF도 개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채권자들은 단기 채권인 GKO를 중장기 채권인 OFZ로 바꾸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 마저도 5년간 채권을 시장에서 팔지도 못하게 제한했습니다. 그 채권을 러시아 정부는 모두 갚았을까요? 결국은 갚았습니다. 푸틴이 집권하기 시작한 2000년도부터 자원 가격이 급등하면서 러시아 재정이 빠르게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제정러시아 빚과 소련 빚, 그리고 1998년 루블화 채권을 갚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금융 시장에서 신의를 지킨 것일까요? 앞 두 개의 빚은 러시아에 일차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칭찬의 여지가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빚은 사정이 다릅니다.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 직전의 루블화 환율은 달러당 6 루블이었고,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한 달 후에는 21 루블이었으며, 러시아 정부가 채무 재조정된 루블화 채권을 모두 상환했을 때의 환율은 35 루블이었습니다. 기간의 이익을 차지하고서라도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러시아가 빚을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소련에 속지 마라’라는 말을 대우증권은 왜 귀담아듣지 않았을까요?
사기꾼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일원 한 장 피해를 보게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할 때도 대게 이런 경우입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원금이라도 갚은 사기꾼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다 갚은 것이 아닙니다. ‘외국인 투자가에게는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내국인 투자가에게는 다 갚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5년간 누적된 실질 인플레이션율과 공식 인플레이션율의 차이가 80%에 달했기 때문에 그만큼 돈을 덜 갚은 셈입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있는 지금 러시아 루블은 달러당 얼마일까요? 오늘 러시아 루블은 1달러에 132 루블입니다. 다 각설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월드뱅크와 IMF에서 1998년에 보내 준 긴급자금 중에 6조 원은 도착 즉시 러시아 은행에서 사라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당시도 지금 못지않게 참으로 기막힌 나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