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쿠바 미사일 위기와 작금의 러시아 핵위협
1.
서구가 세계를 보는 시각과 한국이 세계를 보는 시각은 당연하게도 다르다.
2.
서구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며, 러시아는 서구 반대론적으로 세상을 보며, 한국은 양비론적으로 세계를 본다. 양비론으로 세계를 보면, 서구가 만드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한국에는 러시아적 세상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다. 영미를 제국주의 틀로 보는 사람이 대체로 그리 생각한다. 1991년 소련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에 비하면 양반인 것도 사실이다.
4.
서구에는 러시아적 세상은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러시아가 핵무기라는 단어를 언급한 순간에 그들 생각은 확고해졌다.
5.
바이든은 쿠바 미사일 사태를 언급했고,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걸 말실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NATO는 이미 핵전쟁에 대비하고 있다. 대비를 하면 할수록 핵전쟁 가능성은 낮아진다. 푸틴의 핵전쟁 위협이 블러핑이라는 증거가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국 국방장관은 답했다. ‘그런 증거는 없다.’
6.
이차대전이 끝났을 때 루스벨트는 소련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스탈린을 상종 가능한 인물로 보았다. 그의 생각은 틀렸고, 루스벨트 사후에 영국과 미국은 스탈린을 상종할 수 없는 인물로 단정했다. 스탈린만 죽으면 소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있었다.
7.
그러나 서구에 가장 큰 위협은 스탈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흐루시초프에 의해 발생했다. 쿠바 미사일 사태가 그것이다.
8.
쿠바 미사일 사태를 잘 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J.F. 케네디의 담대함에 후르시초프가 굴복하여 쿠바로 향하던 미사일을 돌렸다고 배웠다. 사실은 그보다 복잡했다.
9.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그 대가로 미국은 터키에 있던 핵시설을 철수시켰다. 소련은 계획을 포기한 것이지만, 미국은 기존의 기지를 철수했다. 이는 터키가 미국을 불신한 시발점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터키는 아직도 미국을 믿지 않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승자는 소련이었다. 단기적으로는 그랬다.
10.
결과적으로 소련은 그 성공으로 인해 붕괴했다. 소련이 미국을 핵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 그리고 소련 위협이 스탈린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소련과의 협력은 있을 수 없었다.
11.
경쟁은 끝이 없었고, 소련은 미국의 생산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소련은 군사력에 더 많은 자원을 할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빵을 생산할 여력도 종이를 만들 여력도 사라졌다. 그렇게 소련이 망했다.
12.
공산주의 경제 체제가 망했고, 소련이라는 정치 체제가 망했고, 국민은 맥도널드와 코카콜라를 위해 줄을 섰다. 철저히 망하고 나서야 서구는 러시아를 국제무대에 받아 주었다.
13.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을 때만 해도 러시아가 국제무대로 복귀할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그런 가능성은 없어졌다.
14.
푸틴만 그 이야기를 했으면 또 몰랐다. 국방장관도 외무장관도 그리고 메드베데프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스탈린만 없어지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제 푸틴이 없어진다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5.
시계는 쿠바 미사일 사태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서구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구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세계에 대한 위협이다. 가장 큰 것이 핵 위협이다.
16.
서구 사회가 이란 핵과 북한 핵에 민감하다. 그러나 이란과 북한 핵은 서구 사회에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5분 안에 모든 군사시설을 선제타격으로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 핵은 미국이나 서방의 본토에 근접도 하지 못하고 요격된다.
17.
러시아 핵무기는 다르다. 런던과 뉴욕에 핵폭탄을 터트릴 수 있다는 말을 대통령, 총리, 장관이 하면서 타협의 여지는 모두 사라졌다.
18.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어떤 다른 국제 사건에서 단기적으로 러시아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소기의 성과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19.
소련이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와 의식 체제를 바꾸고서야 국제무대에 돌아올 수 있었듯이 러시아는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만 국제무대에 복귀할 수 있다. 러시아는 그런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한가하게 협상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20.
러시아가 이란, 사우디, 인도, 중국을 아우르는 대안적 국제질서를 만들 수 있다면 러시아는 소련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동유럽이 모두 소련 편이었고, 인도를 포함한 제3 세계가 소련에 동정적이었고, 프랑스와 핀란드가 소련과 친했고, 중국이 소련을 사상의 조국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에 친소련 운동권이 많았을 때도 불가능했던 것이 지금 가능할까?
21.
이란과 사우디를 아우르는 것이 가능하며, 인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것은 가능할까? 러시아가 인도와 중국의 하부 체제로 만족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만일 누군가의 발아래여야 한다면, 러시아인은 중국이나 인도보다는 미국의 발아래를 선택할 것이다.
22.
서구의 자기 중심성에 러시아 태도가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졌다. 러시아는 그에 대항할 체력이 없다. 고로 우리의 고질적 양비론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