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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Feb 10. 2023

젤렌스키 런던에 오다

London Life

런던의 젤렌스키(Zelensky in London)

  

  

제목만으로 매료되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것이 그렇다.


‘모스크바의 신사(Gentleman in Moscow)’라는 책을 뒤늦게 알았다. 제목만 듣고 주문했다. 모스크바에 간 영국인의 좌충우돌 이야기일 것으로 짐작했다. 뉴욕에 간 영국인, 런던에 온 미국인, 파리에 간 영국인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은 재미있다. 모스크바에 간 영국인은 그중 압권일 것이다. 영국인과 미국인, 영국인과 프랑스인, 프랑스인과 미국인은 달라도 영국인과 러시아인처럼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 도착했다. 내용은 짐작과는 달랐다. 그래도 재미있는 베스트셀러라고 하니 끝까지 읽어 봐야지! 책은 도착한 날부터 읽어야 한다. 묵혀 두면 나는 거의 읽지 않는다. 책을 잡고 소파에 앉았는데, 젤렌스키가 런던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게 연락도 없이! 그가 나를 모르니 연락할 길도 없지만, 그래도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젤렌스키가 미국에 갔었다. 잘한 일이었다. 그의 두번째 방문지가 내가 있는 런던이란 것이 영화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의 관심은 Gentleman in Moscow에서 Zelensky in London으로 바뀌었다.


책을 놓고 TV를 틀었다. 웨스터민스터 홀이었다. 젤렌스키 부인을 비롯한 세계 각국 인사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조문했던 곳이다. 한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은 조문을 하지 않았던 바로 그곳이다.


국회의원과 국회직원이 빼곡히 들어섰다. 맨 앞줄에는 리시 수낙 총리와 키어 스타머 야당 대표가 있었다. 그들은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총리와 야당 대표는 손동작을 섞어 가며 환하게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것일까?


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무슨 이야기인 지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을 플레즌트리(pleasantry)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담 섞인 환담 정도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총리와 야당 대표를 포함한 청중은 10분 넘게 젤렌스키를 기다렸고, 총리와 야당대표는 기다리는 내내 플레즌트리를 즐겼다.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장면인데, 내게는 인상적이고 또 부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 대표와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정부에서는 영수회담이 개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전례가 있었나? 이런 상황 때문인지 플레즌트리 장면을 계속 돌려보게 된다.


젤렌스키는 국회의장(Speaker)과 함께 들어왔고, 청중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박수를 위해 기립한 것은 아니고, 원래부터 서있었고 끝까지 서있을 요량이었다. 의자가 없으니까! 스피커는 ‘웨스터민스터 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벌어진 장소이며, 이곳에서 오늘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쓰여진다’라고 하면서 젤렌스키를 소개했다.


젤렌스키 영어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훌륭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전투기다. 그리고 파일럿을 영국에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전사한 파일럿이 썼던 헬멧을 가져와 국회의장에게 선물했다. 헬멧에는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으며, 자유를 지키기 위한 날개를 달라’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늘 그렇듯이 그의 말에는 결기와 유머가 있다.


젤렌스키의 런던 방문에 놀란 프랑스는 긴급하게 사정하듯 젤렌스키를 파리로 모셨다. 뒤늦은 제스처지만 그것도 좋게 보였다. 의미가 있다면 뒤늦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겨울을 통과하고 있지만, 유럽은 분열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출장 간 친구는 모스크바는 평온하다고 말했다.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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