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WTI 원유 선물이 한때 마이너스 41달러까지 내려갔다. 원유 가격의 하락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세계가 락다운 되면서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품의 가격이 제로가 아니고 마이너스까지 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사과가 썩어서 쓰레기 처리 비용이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썩은 사과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다.
팔기 위해 내놓은 상품의 가격이 아주 짧은 시간에, 소수의 매수자에게, 소폭의 마이너스를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상당한 기간에, 참여자 모두에게, 대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사태는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 전기 시장에 마이너스 전기 가격이 종종 발생한다.
WTI 원유 선물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원인을 살펴보면서 재미있는 몇 가지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첫째 이야깃거리는 선물의 개념적 특징이다. 둘째는 선물 시장의 참여자와 결제 방식이다. 셋째는 에너지 산업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현재와 같이 선물 시장과 에너지 시장이 운영되면 마이너스 원유 선물 가격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선물의 사다/팔다 개념과 쌀을 산다/판다는 개념
국제 원유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원유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상품은 사고팔려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가격이 있다. 우리말로 사다/팔다는 영어의 buy/sell, 러시아어의 купить/продать와 일치하는 개념이다. 사고 판다는 것은 돈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예외 없이 나에게서 돈이 나가는 것이고, 판다는 것은 나에게로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선물은 사거나 파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샀다고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팔았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buy/sell이 아니고, long/short다. WTI 원유 가격이라는 막대기가 있다고 했을 때, 그 막대기가 커지기를 바라는 것을 long, 그 막대기가 작아지기를 바라는 것을 short라고 한다. 선물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가격의 방향을 놓고 하는 베팅이다. 올라갈 것에 배팅하는 사람과 내려갈 것에 배팅하는 사람이 만나면 한 개의 선물 계약이 성립한다. 이때 long을 선택한 사람이 short을 선택한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니므로, 상품에 대한 매수와 매도와는 다르다.
우리가 복잡한 어느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해보자. 복잡한 프로젝트를 하나의 A라는 상품이라고 가정하면, 그 프로젝트 안에는 사고팔고가 많고, 사고파는 것에는 유형의 물건과 무형의 서비스가 다 같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A를 우리가 산 것인가 판 것인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프로젝트로 인해 cash가 in이 되었으면 판 것이고, cash가 out이 되었으면 산 것이다.
이러한 캐시플로의 개념을 우리 조상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시골 장에 곡물을 팔러 가면서 쌀을 사러 간다고 말했다. 상평통보 같은 돈이 있었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돈은 쌀이었다. 상평통보가 어디서는 받고 어디서는 안 받는 '러시아 루블'이라면, 쌀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미국 달러'였던 셈이다. 쌀은 진정한 돈이었고 기축통화였으며, 세계 어디에서나 가치를 인정받는 비트코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콩을 파는 행위는 결국 쌀을 사는 행위였다. 시장에 가서 ‘먹는 쌀’을 파는 행위도 결국은 ‘돈이란 의미의 쌀’을 사는 행위였다. 그렇게 조상은 장에 나가 쌀을 팔아 쌀을 샀고, 쌀을 사서 쌀을 팔았다.
우리는 더 이상 쌀을 판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헷갈리니까 말이다. 그처럼 앞으로 선물 시장에서도 산다와 판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롱과 숏이 정확한 이름이다. 선물로서의 원유와 현물로서의 원유가 작동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매수 매도 개념에서부터 알 수 있다.
선물 시장의 참여자와 결제 방식
선물 시장에 참여자는 세부류가 있다. 첫번째 부류는 원유를 파는 생산업자와 원유를 사는 실수요자다. 두번째는 원유 가격이 상승과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자다. 세번째는 여러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다양한 원유 가격 간의 차이를 거래하는 사람들이다. 원유 시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제각각이다. 전체 참여자의 60%가 투기자, 30%가 실거래자, 10%가 차익거래자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원유의 실거래자들에게 선물이나 현물은 동일하다. 이들에게는 당장 결제가 이뤄지는 것이 아닌 것뿐이지 실질적인 매수와 매도를 한 것과 동일하다. 시장에 이들만 있다면 가격이 마이너스 41불까지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문제는 투기자다. 문제라는 것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투기자의 쏠림 현상으로 인해 간혹 가격의 급등락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투기자는 금융시장의 활력을 불어넣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투기자는 앞에서 말한 원유 가격이라는 막대기가 길어질 것인가 작아질 것인가에 베팅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원유 선물을 매수했다고(정확히 말하면 long 포지션을 취했다고) 해서 원유를 가져다 사용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유 선물을 매도했다고(short 포지션을 취했다고) 해서 팔 원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선물이 현물로 결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약 이행시점 다가온 선물 포지션을 없애고, 이행 시점이 더 많이 남은 계약으로 옮겨 간다. 이걸 롤 오버라고 한다. 한 바퀴 더 구른다는 의미다. 롤오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선물 매수 포지션을 청산하려고 했더니, 그 포지션을 사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즉 한 바퀴 구르려고 했더니, 그곳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WTI가 거래되고 있는 NYMEX에는 현물로 결제하지 않는 방식의 선물 시장도 있지만, 거래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거대 실수요자가 맞붙는 선물 시장이 가장 재미난 전쟁터이기에 투기자와 차익거래자가 그곳으로 몰린다. NYMEX가 좀 더 현명한 결제 방식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물이 있는 곳에 대게는 옵션도 같이 있다. NYMEX는 마이너스 선물 가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옵션의 이론 가격을 결정하는 데에 문제를 드러냈다. 옵션의 이론 가격은 노벨상을 받은 블랙 숄즈 모델이 사용되어 왔다. 블랙 숄즈 모델이 예상치 못한 마이너스 가격 때문에 옵션 이론 가격 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웰스 파고에서 근무하고 있는 윤기선 박사에 따르면 NYMEX는 상품 가격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여 당분간 옵션 가격 결정 모델을 바셀리에 모델로 바꾸었다고 한다. 혼선이다.
독일의 전기 시장에 마이너스 가격이 있었다
상품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독일의 전기 시장에서 있었고, 드물지만 되풀이되고 있다. 2007년 2008년에도 있었고, 2016년에도 2017년에도 있었다. 2017년 1월에 메가와트당 102유로 하던 전기의 가격이 2017년 10월에 마이너스 83 유로까지 하락했다. 146시간 동안이나 이런 마이너스 전기 가격이 지속되었다.
전기 시장에 마이너스 가격이 가끔이나마 등장하는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전기는 저장이 잘 안 되는 특성이 있다. 저장할 수 있지만, 저장 시설을 만드는 비용이 더 든다. 둘째, 일시적으로 전기가 남아돈다고 해서 대형 발전소를 잠시 중단하기가 어렵다. 셧다운 후에 재가동하는 비용이 마이너스로 전기를 파는 것보다 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셋째, 일시 중지가 가능하다고 해도 열병합 발전소의 경우 전기와 무관하게 뜨거운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발전소를 중단할 수가 없다. 넷째, 대체 에너지의 경우에는 화력 발전소보다 중단 및 재가동이 쉽지만,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최저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에 발전 가동을 멈출 이유가 없다.
독일 전기 시장이 원유 선물 시장에 주는 교훈
원유 매도를 미리 확정 지었던 원유 생산업체 및 판매업체는 원유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에 진입했을 때에 왜 포지션을 청산하지 않고, 원유 현물을 건네주는 것을 원했을까? 마이너스 20불 또는 30불에서 왜 포지션을 청산하지 않았을까? 원유 생산시설도 화력 발전소처럼 일시 중단하기가 어렵다. 파이프 라인의 원유 흐름도 일시 중단하면 파이프 라인이 굳는다. 많은 비용이 들기에 원유 공급을 잠시 줄이는 것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원유 시장은 독일 전기 시장과 유사한 면이 있다.
생산시설, 파이프 라인, 탱커, 유조선이 현재와 같이 운영된다면, 원유 선물 가격의 마이너스 진입하는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다. 독일 전기 시장처럼 말이다. 그래도 원유는 전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저장이 용이하다. 원유 저장 시설이 확충된다면 나아질 것이다. 그리 되면 원유 선물이 독일 전기처럼 마이너스로 진입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