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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n 21. 2020

Battle of Hastings와 황산벌 전투

영국 역사

1066 Battle of Hastings와 660 황산벌 전투
   
  
660년에 신라 군대가 육지로 백제를 공격했고, 당나라 군대가 금강을 타고 백제에 쳐 들어왔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15만 명이었고, 신라 군대는 5만 명이었고, 백제 군대는 5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다 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라의 깊숙한 곳을 유린하던 백제의 군대가 신라 군대와 그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는가? 수적인 차이가 컸다면 왜 성곽을 지키면서 진지전을 하지 않고, 황산벌에 나가 전면전을 했을까?

나는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태어나 자랐다. 1933년생인 아버지는 부소산성에 소풍을 자주 갔다. 백제 산성의 바닥을 조금만 파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불태워진 백제의 군량미 잿더미를 볼 수 있었고, 잿더미 일부를 파서 집에 가져오기도 했단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켰던 계백 장군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안타깝다. 계백 장군은 가족을 모두 자신의 칼로 베고는 마지막 전투에 나갔다. 5천의 군대로 5만의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박중훈이 계백으로 나오는 영화 황산벌은 무척 재밌다. 계백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계백을 따랐던 용맹한 군사들은 계백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생존한 사람은 제일 못난 군졸이었던 이문식이었다. 유일한 생존자 이문식이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 전원주를 만나면서 영화가 마무리된다. 우리는 계백의 후손이 아니라 이문식이나 전원주의 후손인 셈인가?
   
  
런던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인 Hastings에 다녀왔다. Hastings는 도버와 브라이튼 중간에 있는 남해안의 도시다. 도버가 부산이고 브라이튼이 삼천포라면, 헤이스팅스는 진해 정도라고 보면 된다.

헤이스팅스는 1066년에 노르망디의 지배자 윌리엄이 영국으로 건너와 해로드와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다. 이를 ‘1066 격전지(1066 battlefield)’라고 한다. ‘정복자 윌리엄’이 만든 왕조가 지금의 영국 왕실로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헤이스팅스 전투가 영국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헤이스팅스 격전지에 가면서 백제와 계백 장군을 떠올렸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정복자 윌리엄의 승리한 것을 외세가 토착 세력을 물리친 것으로 아래와 같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영국에는 앵글로 색슨 왕조가 있었다. 프랑스인이기도 하고 바이킹이기도 했던 정복자 윌리엄이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왔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통 영국 왕조를 쉽게 무너뜨리고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만들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는 단순화하면 거의 늘 틀린다. 전투 현장에서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김밥을 먹으니 역사가 한눈에 그려졌다. 역시 소풍을 와야 역사가 머리에 들어온다.

1066년의 영국은 봉건제조차 정착하지 못한 단계였다. 이웃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노르망디, 프랑스가 있었다. 영국이 제일 약한 축에 속했다.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봉건 영주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바이킹은 시도 때도 없이 영국을 쳐들어왔고, 그럴 때면 영국 왕은 노르망디나 프랑스로 피난을 갔다. 덴마크 노르웨이 노르망디 프랑스와 영국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 사촌에 육촌에 팔촌에 사돈에 그런 복잡한 관계였다.

영국의 왕이었던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손 없이 죽자 사촌인지 육촌인지 하는 해로드가 왕이 되었다. 그러자 노르웨이 왕이 자신이 영국 왕의 계승자라고 주장했고, 참회왕과 친척이었던 노르망디의 지배자 윌리엄도 자신이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덴마크 바이킹을 피해 노르망디에 머무를 때, 윌리엄에게 영국 왕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마디로 어디가 적통인지 혼란한 상황이었다. 외세와 토착 세력이란 이분법은 적합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 쳐 들어왔고 해로드의 동생인 토스티그(Tostig)는 노르웨이의 편을 들었다. 해로드는 전쟁을 간신히 이기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 군대를 만났다. 해로드의 군대와 윌리엄의 군대는 각각 7천 명에 불과했다. 계백 장군의 군대보다 겨우 2천 명 많았고, 김유신 장군의 군대보다 7배나 작은 규모였다. 해로드도 윌리엄도 대단한 세력은 아니었다.

전투는 막상막하였고, 해로드 왕은 전투 중에 윌리엄 군사들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전사했다. 당나라 군대가 645년 고구려에 침입하여 안시성 전투를 벌였을 때,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고 퇴각했다는 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안시성을 공격한 당나라 군대의 수가 10만 명이었다.

양만춘은 정확히 당 태종을 겨냥하여 활을 쏜 것이지만, 윌리엄 군대가 해로드의 눈을 맞춘 것은 마구잡이로 쏜 화살의 우연이었다. 양만춘과 당 태종의 이야기는 근거가 희박하며, 양만춘의 역사적 존재 자체도 부정확하다는 설이 있다. 이쯤 되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자료를 만나면서 생기는 확신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어쨌거나 정복자 윌리엄은 운 좋게 헤이스팅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1066년 크리스마스 날에 웨스터민스터 애비에서 영국 왕에 등극했다. 유럽에 있던 봉건제를 영국에 정착시켰다. 봉건제가 약점 투성이 제도 같지만 당시로서는 선진 제도였고,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정복자 윌리엄의 영국은 후에 해상을 장악하고, 무역을 진흥하고,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오늘에서야 헤이스팅스의 ‘1066 격전지’를 방문한 것은 늦은 감이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황산벌 전투의 지점을 정확히 특정하지 못한다. 대형 기념물이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660 battlefield의 위치를 고증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문식이나 전원주의 기록 같은 게 발견될 가능성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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