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양선생활

팔월의 어느 날에

by lemonfresh

며칠 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쳤다. 어디서 왔는지 잠자리들이 낮게 날아다니고 랑이가 잠자리를 잡으려고 겅중겅중 뛰며 쫓아다녔다.


아들네가 놀러 올 것이어서 점심 준비를 해야 했지만 마당이 궁금해서 나가 보았다. 이렇게 비가 그친 다음에 풀을 뽑아야 한다. 땅이 물러서 뽑기 쉬운 것도 그렇고, 풀들이 비를 맞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기 때문에도 그렇다.

옷을 더럽히지 않아야 해서 선호미를 찾아 하기 쉬운 곳만 몇 군데 긁적였다. 막상 마당에 나가보니 얼른 들어가서 식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엌과 마당으로 마음이 갈라져서 곤란했지만 부엌을 선택해서 다시 들어왔다.


점심 메뉴는 김밥으로 했다. 며칠 전부터 내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밥은 몇 줄 사서 먹는 게 간편한데 손자 손녀에게는 직접 해 주고 싶어서 내가 싸기로 했다. 특히 손녀 세하는 달걀을 풀어서 얇게 부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넉넉히 준비했다. 당근도 채 썰고 재료를 골고루 준비해서 넣었다.


김밥을 다 해놓고 보니 얼른 먹고 싶어서 아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남편과 먼저 먹었다. 아들네는 집 청소를 하고 오느라 좀 늦는다고 한다. 김밥을 먹어보니 입맛에 맞았다. 남편도 맛있다고 했다. 사지 않고 내가 만들기를 잘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음식 맛에 대한 취향이 고착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들어야 내 입에 맞는 것이다. 비단 입맛에서 만이 아니라 삶 전반적으로 유연성은 점점 줄고 경직성은 증가한다. 나는 늘 이것을 경계하는데 다만 경직성의 정도가 내 연령에서 일반적인 수준이길 바라고, 내 인식이 아직은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들네 가족이 왔다. 내가 김밥을 썰어 주었다. 그런데 손자 호수의 첫마디가 "내가 싫어하는 게 들어있어."였다. 한 입 먹어보기도 전에 퇴자부터 놓는 것이다. 손녀 세하도 말했다. "나도 싫어하는 거 있어." 손자가 싫다는 것은 게맛살이고 손녀가 싫다는 것은 우엉이다. 호수는 왠지 몰라도 게맛살을 안 먹는다. 세하는 전에는 그런 얘기 안 했는데 오빠 따라서 퇴박을 놓는다. 열심히 준비했건만 일순간에 기대가 허물어졌다. 그래도 맛살과 우엉을 빼고 각각 먹어보더니 맛이 있다고 했다. 좀 더 눈치 있게 굴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잘 먹어서 서운함이 좀 가셨다.


호수에게 비가 그쳤으니 나가서 놀자고 했더니 안에서 노는 게 더 좋다고 한다. 밖에서는 더워서 못 놀겠단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휴일에 무엇을 할지 아이디어를 모아서 종이에 쓴 다음 냉장고 옆에 붙여놓았다.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러도 가고 호수가 좋아하는 아쿠아리움도 써넣고, 해변에서 조개껍데기 줍기도 하기로 했다.


한참 더 놀 다가 저녁을 먹었다. 아들네는 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아예 잘 옷으로 갈아입혀서 차에 태우는 것이다. 대부분은 가면서 잠이 들기 때문에 그렇다.


아이들이 가고 나서 생각해보니 호수가 밥을 너무 적게 먹어 걱정이 되었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수박을 찾아서 제 아빠가 가져다주었다. 세하는 때마다 제 몫을 다 먹기 때문에 오빠보다 훨씬 충실하게 먹는다. 호수가 세하만큼만 먹으면 참 좋겠다. 세하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별로 없다. 밥 잘 먹고 잘 놀고 욕심도 있어서 뭘 하든 잘할 것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일찌감치 방에 들었다. 에어컨 아래서 뒹굴뒹굴하며 쉬었다. 이제 곧 진짜 가을이 되면 여름내 가짜 가을을 만들어주던 에어컨도 쉬게 될 것이다. 내일 출근할 옷을 생각해 보았다. 얇은 웃옷을 하나 가지고 나가야겠다. 걸쳤다 입었다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퇴근길에 날씨가 허락되면 신정호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양말도 하나 챙겨야겠다.


휴대폰을 챙겨 들었더니 아산시청, 행정안전부, 산림청, 심지어 전에 살던 예산 군청으로부터 각각 안전 안내 문자가 와 있었다. 아산시청과 예산군청에서는 코로나를 조심하라는 것이고 산림청에서는 산사태 위기경보를, 행정안전부에서는 호우 주의보를 보냈다. 하천변 접근을 자제하고 산사태와 침수 위험이 있으니 해당지역에서는 대피를 하라고 한다. 지역예보로 봐서는 내일 비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신정호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나이 먹어서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철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물난리 걱정하라는데 호숫가에서 저녁놀을 보겠다는 것이 아마도 '철없는'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도 양말은 챙겨야겠다. 퇴근은 내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한 날마다 할 것이고, 나는 그때마다 신정호 옆을 지날 것이며, 어느 날이든 노을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을 주중의 저녁시간은 최대한 신정호 산책로에서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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