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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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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Nov 07. 2022

늦가을 일지

Life is but a dream

어제, 일요일, 오랜만에 지인(남편 친구 내외)을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남편이 우리 집에서 차를 마시자고 해서 같이 들어왔다. 마침 맛있는 사과를 사 둔 것이 있어 깎아서 거실로 나갔다. 햇볕이 들어 따스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햇빛을 쬐던 중 어떤 느낌이 떠올랐다. 갑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고 고요 속에 혼자 있는 듯한 느낌, 평화롭고 따뜻하고 밝고 조용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느낌은 뭐였을까, 잠시의 환각이었을까?


*     *     *


손님을 배웅하러 나갔다. 아들네가 와 있어서 다 같이 나갔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서 아들도 그 내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배웅을 하고나서 남편이 마당에서 낙엽을 치운다고 했다. 호수도 한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쓰려던 갈퀴를 주었다. 세하도 하고 싶다 해서 세하도 하나 주었다. 낙엽을 치우는데 도움이 되는 건지 방해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아이들은 신이 났다. 나도 마당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먼저 들어왔다. 저녁밥 지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부조림을 하려고 먼저 두부를 부쳤다. 고등어조림과 미역줄기 볶음, 며칠 전에 담근 깍두기와 같이 내면 되겠다. 밖에서는 작업이 한참 걸렸다. 식사 준비가 거의 될 즈음 아이들이 들어와서 씻고 나서 식탁에 모였다. 호수 세하가 바깥 활동을 하고 나니 밥을 잘 먹었다.


 '가을이 되니 할 일이 많네.'

호수의 말이다. 지난주에는 감을 따서 곶감을 하려고 깎아 걸었고, 그 전 주에는 꾸지뽕을 따서 갈무리했다. 장 구경을 나갔다가 튤립과 크로커스 구근도 사서 심었다. 낙엽도 치우고 수도꼭지도 싸매고, 가을이 되니 할 일이 많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밖이 깜깜해졌다. 호수 세하가 더 놀고 싶어 해서 아랫밭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작은 랜턴을 하나씩 챙겨주고 뒤를 쫓아갔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달이 꽤 크고 환했다. 아이들은 랜턴 놀이를 재미있어했는데 동네 개들이 짖어서 적당히 하고 차에 태워 보냈다. 아이들이 졸리고 피곤해서 공연한 고집을 피우기 전에 얼렁뚱땅 차에 태우는 게 요령이다.


집에 들어와서 일찍 누웠다. 가을이 깊을수록 밤이 길어진다. 긴긴밤은 가을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아직 십일월 초순이니 동지까지 한 달 넘게 남았다. 잔고가 넉넉한 통장을 가진 기분이다.


밖에는 밤이면 서리가 내린다. 마당의 수국과 무화과 잎이 푸그르르 시들었다. 화분을 마저 들여놓기를 잘했다. 마당의 풀도 나무도 내년 봄 까지는 죽은듯한 휴식을 취할 것이다.


*      *      *


아침에 깨고 나면 지난밤이 꿈같다.

가을이 깊고 보니 지난여름이 꿈같다.

새 봄이 되어 벚꽃이 필 때에는

가을도 겨울도 이 긴 밤들도 꿈만 같을 것이다.


'잠시의 환각이었을까?'

나는 이 생각을 또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어느 날,

나홀로 일생을 돌아보게 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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