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 단상_5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란 영화가 있었다. 늙은 퇴역장교와 소년이 서로를 보듬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나간다는 이야기로,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 속에서 '여인의 향기'란 퇴역장교인 알 파치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로만 형상화된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그는 여인을 눈으로 보는 대신 향기로 느끼고 지각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향기로 알아차리는 여인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정확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은 속일 수 있지만, 향기는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알 파치노처럼 예민하게 느끼진 못해도 우리 역시 수많은 향기를 감지하면서 살아간다. 향기란 맡을 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뿜어낼 수도 있는 것. 우리가 공기처럼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맡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말의 향기다. 단어로 옷을 해입고 어조로 향기를 뿌리는 '말'은 몸에 뿌리는 향수보다 더 강력한데도, 정작 말을 하는 당사자는 자신이 어떤 향을 흩뿌리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말의 향기는 은은하고 좋은 것도 있지만 지독한 것도 있어서 가끔은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무섭다. 피부로 접촉하는 말뿐만 아니라, 상대하지 않아도 속수무책으로 창같이 꽂히는 말들도 있어 당혹스럽다. 언론이나 매체가 쏘아보내는 말과 글들은 마치 작은 화살들이 무더기로 난사되고 있는 느낌이다. 방패도 없이,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 화살들을 받아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 견디고 살아있음이 장하게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매섭고 거친 기운이 얼마나 몸속으로 스며들었을까 걱정스럽다. 나 자신도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요즘은 그렇게 무서울 때 詩 속으로 도망을 간다. 새벽을 깨우는 산새 같은 시, 주위를 환하고 따뜻하게 밝히는 시, 차가운 물 속에 머리를 담그는 것처럼 정신을 바짝 깨우는 시, 내가 몰랐던 좋은 시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깊은 산속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샘물처럼 도서관 갈피갈피에 숨어있는 시들을 읽으며 이 말의 힘으로, 글의 힘으로 세상이 죽지 않고 살아나고 있구나 생각한다.
좋은 말도, 좋은 글도, 좋은 사람도 참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바로 옆에서 가까이 맡을 때보다 지나치고 난 뒤 여운으로 더 오래 남는다. 뒷모습이 고운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되는 것처럼. 나는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나, 돌아보는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