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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 May 17. 2022

소호의 시


'네' 대답을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던 어느날

누군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카톡 창 안에서

머리 묶은 여자아이처럼 다소곳하게


구릿빛 얼굴에 이마도 훤한

그가 대답하여서 어쩌다 그랬거니 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도 예 하고

세 번째도 예 한다


나는 그제야 ‘예’를 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히-계세요

반질반질 마룻바닥처럼 윤이 나던 인사들과

우르르 몰려가던 머리, 새까만 콩알들과


수업시간에 딴짓하면 일나는 줄 알고

귓속말도 못하던 아이 하나와

햇볕보다 먼저 달궈지던 운동장과

여드름 난 이마와 하얀 교복 칼라와


그속에서 풀처럼 깊게 자라던 ‘예’가

다시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이테로 한 겹씩 자라다 어느날부터

‘네’에 떠밀려 사라져버린


‘네’는 방패 같다

각진 창에 각진 대답으로 네, 하면

나는 무기를 쥔 군인처럼 씩씩해진다

무엇이든 베고 고개를 휙 돌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네, 하고 대답하는 동안

‘예’는 슬퍼하고 있었으려나

뒷골목 돌아다니며 푸른 눈을 가진

어린 나를 찾아다니고 있었으려나


이제 이리 오라고 '예'가 부른다

‘예’는 안으로 길을 내는 말

껍질 없이 소리로 감겨드는

어깨에 기대 엉엉 울어도 좋은

오래된 끄덕임, 그 길고 긴 속눈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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