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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 Sep 07. 2022

이름을 짓는다는 것_ "호두야!"

일기_ 2022.0907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란 책이 있었다.

작가는 신시아 라일런트.

그 그림책을 읽으며 "좋은 그림책이구나" 했다.

나는 '좋다'는 말을 꽤 인색하게 쓴다.

'백만번 산 고양이' 같은 소장각 일 경우에 쓴다.


그래도 그냥 "좋다" 했지, 내가 이름 붙일 줄은 몰랐다.

작년 2021년, 이 아이가 내 앞으로 굴러왔다.

20년간 운전을 말린 (애정 어린 노파심이었다고 최대한 이해하려 한다) 남편이 허락한, 처음으로 갖게 된 내 차다.

마티즈. 중고. 게다가 빨강색.

어느 교회 전도사님이 타던 차라고 했다.

빨강색은 제일 피하고 싶은 색깔이었다.

그런데 가격이 너무 착했다.


휴... 그리하여 이 빨강색 마티즈가 내 차가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내, 나의, 라는 말이 앞에 붙는 것 앞에서는

뭐랄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빨강 마티즈를 만난 첫날, 이 애한테 말했다.

"네가 부담없어 좋긴 하지만, 격식 차리고 점잖은 자리엔 널 데려갈 수 없겠다."

아, 솔직히 정말 촌스러워 보였다.

중2 딸애한테도 털어놓았다.

"차를 뭐 타고 다니고.. 이런 게 중요하진 않지. 그래도 신경쓰이면 언제든 얘기해."

딸애를 하교시간에 맞춰 픽업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었다.


딸애는 어떤 때는 신경을 쓰는 듯도 했는

(전교생을 태우는 버스가 도열해 있을 때 한번 그랬다) 보통은 아무렇지도 않아 다.

다행이다. 얘가 물질적인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길 바랬다. (누구 딸인데...란 생각을 했던 거, 자백한다)


딸애를 하교시켜주러 다니는 등... 내가 내 빨강 차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날

얘한테 이름을 붙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동안 같이 지낼 건데 '마티즈' 이런 이름은 얼마나 개성없고 무뚝뚝한데다 정감이 없느냔 말이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호두'란 이름을 지어줬다.

호두! 작고 야무지고 단단하다.

내 마티즈도 그렇다. 쬐그만 게 갈 데 다 가고

좁은 틈새 다 빠져나가고, 기름도 조금 먹는다.

이런 차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가 '호두'란 이름을 붙여준 순간, 이 낡은 중고 마티즈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촌스러워 보였던 것이 오동통하니 귀여워 보이고

여기저기 살짝 흠집이 있는 것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것이다.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것과 안쓰러운 느낌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차를 타면서 호두에게 말한다.

"가자, 호두! 오늘도 잘 부탁해!"

좀 우울하고 기분이 안 좋을 때도

호두에게 말한다. 내 기분이 이렇다고.


사람도 아닌 기계인데.

그것도 무슨 인공지능 로봇도 아닌 낡은 자동차일 뿐인데

나는 "호두야~" 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솔직히 하나 더 얘기하자면

무슨 큰 사고가 나더라도 난 호두가

(저를 희생해서라도) 나를 보호해줄 것만 같다.


내 이런 말들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리라.

그렇다면 무엇에게든 이름을 지어줘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살아있는 생물체뿐 아니라

무생물인 기계나 물건한테도 에너지나 기운은

통하는 것이라고... 한번 이름붙여줘보라고.

김춘수의 '꽃'이 괜히 유명한 시가 되었겠는가.

이름을 붙여주면 그것은 내게 꽃이 된다.


아... 가을밤이다.

어제와 오늘아침은 도서관 정원에서

너무도 예쁜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고추잠자리가 그렇게 예쁜 색깔이었다니!

모든 한중간에 나는 살고 있으니

베개한테, 침대한테, 꽃병한테.. 아, 내 옆에 있는

모른 척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한테

그래, 눈인사 정도는 날려줘도 좋을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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